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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돌격의 발전과 중세 보병의 변천사에 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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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원래 링크의 삐라따님의 댓글에 대한 답글로 달려던 글이지만, 너무 길어져서 결국 독립된 글로 올립니다.



1. 중세 서유럽 중기병 돌격의 발전, 그리고 그 근원적 한계

  중세는 서유럽의 중기병들에게 엄청난 변화의 시기였습니다. 8세기 경 동방으로부터 전래된 등자라는 물건은 중기병, 특히 돌파력을 믿고 적 보병진에 돌격해야 하는 '충격기병'들의 양성 난이도를 낮춰줍니다. 이전에도 기병창을 이용한 돌격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당장 헤타이로이와 파르티안 카타프락토이가 4~5m짜리 창을 들고 충격기병 역활을 수행했습니다.), 이 당시의 거창돌격은 낙마를 막기 위해 말의 배를 자신의 두 발로 꽉 조인채 역시 돌격시의 충격으로 인한 낙마를 막기 위해 창을 두손으로 잡는 형태로 이뤄집니다. 즉 엄청난 집중력과 배짱, 기마술이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8세기 들어온 등자라는 존재는 안정성과 충격의 흡수 모두 어느정도 해결해줄 수 있는 물건이고, 합성궁과 기계식 쇠뇌의 도입으로써 강해지는 투사무기를 막기 위해 기병들은 작은 방패와 한손으로 들 수 있는 한계라 불리는 3~4m 짜리 기병창을 들고 돌격하는 일이 많아집니다.(물론 랜스 역시 쓰였습니다.)

  이 당시 기병들의 돌격은 쇄기꼴 형태로 이루어집니다. 이는 랜스가 없는데다 아직 군마의 종 개량이 완성에 다가가지 않아 비교적 가벼운 말을 타고 다녔던 당시 기병들의 충격력 한계를 만회하기 위해 쇄기꼴의 끄트머리쪽의 깊은 종심을, 즉 많은 기병들의 연속됀 타격을 중첩시킴으로써 대열에 '구멍'을 뚫기 위해서입니다. 이 시절 기사들은 적 중보병 대열의 '측면'으로 돌격해 적 중보병 한두명이라도 죽인 뒤 적 보병 대열로부터 이탈하는데 성공하면 성공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은 최대 4.5m에 달하는 랜스의 전면적 도입, 그리고 900kg에 가까운 대형군마들의 등장과 함께 해결됍니다. 랜스의 전면적 도입은 바로 갑옷에서 한가지 부위가 발달하며 이뤄진 것인데, 바로 '랜스 거치대'입니다. 거치대가 랜스가 목표물에 충돌할 때의 충격을 완화시켜주고, 대형 군마의 순간적인 질주에 의해 부딪힌 상대방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는 상황은 드디어 중기병의 부족한 충격력을 그 극한까지 끌어올려주었습니다. 그럼 드디어 반지의 제왕 3편에서 나오는 로한군의 돌격처럼 기병이 보병을 정면으로 침투해 학살하는게 가능해졌을까? 아닙니다. 여전히 그들의 목적은 '구멍'을 만드는데 제한 돼었습니다.

  왜, 왜 아직도 중기병은 '구멍'을 만드는데 그쳤을까. 그것은 바로 말이라는 '동물'의 한계입니다. 동물은 위험 요소 앞으로 달려나가는 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합니다. 당장 야생의 말을 보면 코앞의 나무 그루터기조차 뛰어넘으려고 하지 않고 돌다리 짚고 밟듯 조심스럽게 건넙니다. 이런 간단한 나무 그루터기조차 기수의 인위적인 조작이 있어야만 움직이는데, 대낮의 햇빛에 반짝반짝이면서 자신의 눈앞에 반짝이는 창칼 앞으로 말을 움직인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훌륭한 자살행위를 선택하셨습니다. 당신이 랜스를 들어 적보다 리치가 기니 안전거리에서 찌를 수 있을 것이다? 말은 이미 당신의 4~5m 앞에서부터 당신의 통제를 벗어나 멋대로 멈출것이고, 당신은 랜스를 적에게 찔러볼 기회도 없이 낙마해 당신을 죽여 갑옷을 전리품으로 가져가려는 보병을 맞이할 것입니다. 결국 랜스와 플레이트 아머로 중무장한 시점에서도 기사들은 여전히 일점 집중운용은 꿈에도 못꾸고 4~5갈래로 갈라져 적 보병대열에 계속 '구멍'을 내야했습니다.



2. 우리는 결코 전쟁터의 보조가 돼지 않을 것이다! 우린, 전쟁터의 주인이 됄 것이다. - 중세 유럽의 보병에 관해 

  위와 같은 상황에서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구멍이라 표현됄만큼 작은 흠집밖에 못내는 기병들을 그렇게 정성들여 육성했나요?'라는 의문이 말입니다. 그 답은 간단합니다. '그 구멍이 우리 보병을 막아내는 적 보병의 진열의 흠이고, 그 흠에 대한 압박을 통해 우리 보병들이 적 보병의 진열을 무너뜨릴 수 있을테니까요.'. 네. 저 위 링크에 올린 글에서 삐라따님은 중세 주력이 중기병이라고 하셨지만, 서유럽 전투에서, 제대로 됀 국가와 국가간의 전투에서 중기병이 보병을 밀어내고 전투의 주력으로 등장한 사례가 사실 더 희귀합니다. 언제나, 고대에부터 21C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전투는 우리 모루가 먼저 무너지느냐 적 모루가 먼저 무너지느냐에 의해 결정돼었고, 그 모루를 담당해오던 것은 보병입니다.

  물론 중세 시절 기병들의 돌격은 고대 시절에 비하면 훨씬 쉬워졌습니다. 이미 설명한 중세 중기병의 발전도 있지만, 중세 초창기의 혼란속에서 로마나 헬라스와 같이 중보병을 양성할 수 있는 대국이 줄어들은 상황 역시 기병들이 적 진열을 무너뜨리기 더 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맨엣암즈의 등장으로써 유럽에 중장보병이 들어왔다'라는 통론과 달리, 그 암흑시기조차 유럽은 중장보병들이 날뛰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서유럽과 북유럽의 기록속에서도 발견됍니다. 당장 악명높던 바이킹부터, 왕 스스로가 중장보병이었으며 기병은 단 한명도 끌고 오지 않았지만 왕이 죽는 그 순간까지 노르만군에게 패색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았던 헤이스팅스의 웨식스군, 그 웨식스군이 헤이스팅스 직전에 박살내고 돌아온 하랄3세의 노르웨이군 모두 중보병을 중심으로 한 군대였습니다. 이들 모두 체인메일로 대표돼는 당대 최고급의 갑옷과 금속 등으로 보강한 나무방패, 그리고 도끼, 창, Falx와 같은 중무장을 갖춘 채 적 중보병 진열과 부딪히는 전투를 계속해왔습니다. 결코 서유럽의 전투는 기병과 그들에게 분쇄돼지 않게 어떻게든 버티는 농민병의 전투라는 일반적 상상과 같은 형태로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중세초기 진정한 중장보병의 유토피아는 콘스탄티노플과 키예프로 대표돼는 '문명'유럽이었습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은 서방세계 최고의 부를 자랑하였고, 비잔틴 제국은 거듭돼는 동방에서의 침략을 굳건히 버텨내고 있었습니다. 키예프 루스의 노르딕인들은 이런 콘스탄티노플의 부를 선망하였고, 몇차례 투닥대던 이들은 키예프의 비잔틴 내전에의 개입을 계기로 더없이 친밀해져 키예프는 제3의 로마를 자칭하며 키예프의 공주가 프랑스에 시집가고서는 '이 더러운 프랑스놈들하고 같이 못살겠다!'라며 자신의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 보낼 정도의 선진국이 돼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두 유럽의 선진국의 군대의 중심이 중보병임을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잔틴은 로마 레기온의 시대로부터 진화돼어온 중보병의 국가였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시대에서도, 니케포루스의 시대와 바실리오스 2세의 시대에도 그들은 여전히 '레기오나리'의 후손인 '스쿠토타이'를 군대의 주축으로 삼았습니다. 제국의 전성기, 제국이 무엇보다도 열심히 육성한 병과는 카탁프락토이와 같은 중기병이 아닌 스쿠토타이였습니다. 이들의 무장은 유스티니아누스 시대까지는 로마 레기오나리에게서 큰 변화를 겪지 않았지만 이후 큰 변화를 겪는데, 이는 후술하도록 하겠습니다.

  키예프는 애초에 부흥의 계기가 비잔틴에 바랑기안이라 불리는 중보병 용병대를 보내준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충성심에 감동한 비잔틴의 황제들은 이들에게 큰 보수를 줌에 거리낌이 없었고, 이 큰 보수는 그들의 고향에 크나큰 발전을 불러왔습니다. 물론 그 부작용도 없진 않았는데, 점점 많은 바랑기안을 요청하는 비잔틴 제국과 큰 보수에 이끌려 계속 비잔틴으로 떠나는 사람들로 인해 키예프 내부의 농경과 국방에 지장이 와 결국 키예프는 11세기 중후반에 키예프 인들의 비잔틴 제국으로의 용병업을 금지합니다.

  서유럽과 동유럽을 중심으로, 맨엣암즈가 등장하기 전의 중보병들은 대체로 귀족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기마술과 기병 운용은 너무 복잡하고 시간과 돈이 많이 투자돼는 직업이었고, 그에 비해 아직 기병돌격은 큰 의미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대부분의 귀족들은 여전히 두발로 걸어다니며 싸우길 선택했습니다. 이 당시 이들의 주무장은 주로 모닝스타나 도끼와 같은 초기형 폴암이었습니다. 폴암은 농민들이 전쟁에 투입되는 경우가 늘어나며 농기구가 전쟁에 맞게 변화하기 전에 이미 귀족들이 써먹기 쉬운 무기가 점점 이상적인 길이로 진화하는 형태였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Bill이라 불리는 폴암의 일종이 농기구로부터 변화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상당수였지만, 지금은 게타에족, 그 뒤를 잇는 고딕족들이 사용하던 Falx라는 무기가 변화한 것 아니냐는 의견이 중점화돼어가고 있습니다.)

  8세기 유럽에 처음 도입된 등자는 기병의 양성 난이도를 낮춥니다. 이에 많은 귀족들이 '기사도'에의 로망 등을 이유로 보병에서 기병으로 갈아탑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중기병에 비한 중보병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고 점점 늘어나는데, 이는 비잔틴의 선진 농경기술의 도입을 통한 서유럽의 부유화를 통해 등장한 중상계층이 '맨엣암즈'를 점차 형성해가기 때문입니다.(많은 분들이 중상계층의 등장에 대해 흑사병이 원인이 아니냐고 반문하실지 모르지만, 현재 학설로는 흑사병은 '점점 부유해지는 유럽에 농노의 감소를 동시에 불어일으킴으로써' 중산층의 숫자를 늘렸을 뿐, 중산층은 이미 흑사병 이전에 등장하고 있었고,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흑사병과 비슷한 전염병이 유럽을 휩쓸고 지나간건 한두번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아니, 애초에 흑사병이 페스트가 맞는지부터가 의심돼고 있죠. 애초에 전염병을 통한 농노의 감소로 중산층이 늘어난다는 이론은 비잔틴제국이 유스티니아누스 사망 이후 중산농민층의 감소를 설명하지 못하는 모순이 생깁니다.) 뭐 맨엣암즈 이후의 중보병의 발달사는 여러분도 잘 아시리라 생각하고, 이 글에서 특별히 덧붙이진 않겠습니다.



3. 폴암

  위에서 설명했듯, 폴암은 원시적 형태로나마 중세 초기부터 사용되어 왔습니다만, 이 사용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맨엣암즈의 등장입니다. 수준급의 중무장을 갖추고 폴암을 든 맨엣암즈의 등장이 서유럽 전사에 미친 실질적 의미는 '기존의 소수의 귀족 기병&중보병 + 농민병'이라는 전투의 양상이 귀족 중보병들의 기병으로써의 이탈에 의한 중보병 감소를 막아내고 역으로 양상을 '소수의 귀족 기병&중산층으로 이뤄진 대규모의 중보병'으로 만들었다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위에서 서술햇듯, 이 시점에서 기병들은 랜스의 도입과 함께 그 충격력의 극한을 달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암으로 무장한 중보병들은 여전히 기병의 돌격력을 측면으로만 국한시켰습니다.

  사실 앞으로의 문단이 삐라따님의 답글에 대한 제 답글의 답변입니다만, 너무 긴 우회로를 걸었다 생각하는군요. 사실 위의 말의 본능적 공포라는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만, 여기서는 그 말의 본능적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무기의 '범위'에 대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모두들 로마의 레기온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네. 스큐툼이라 불리는 사각형태의 방패, 필룸과 글라디우스로 대표돼는 그들이요. 이 중 필룸이라는 무기체계는 기본적으로 투창입니다. 아주 비싸고, 재활용하기 뭐같은 투창이지요. 당연히 로마 군단병들은 이 무기체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대량양산하기 쉽지만도 않은, 거기다 1회용인 무장이 현장 보병들의 불만을 들어가면서도 오랜기간 사용됀 것입니다. 로마가 돈이 없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유는 바로 후기 로마 군단병의 변화를 봐야 나옵니다.

  로마 레기오나리들은 제정 후기에 들어서며 커다란 변화를 겪습니다. 사각형 형태의 스큐툼은 (사실 언어만 약간 바뀐) 원형 스쿠톤으로 바뀌고, 글라디우스는 장검 스파타, 그리고 궁극적으로 2~3m의 단창으로 변화합니다. 그리고, 필룸이 최종적으로 다트로 변형됀 것은, 바로 단창이 레기오나리들의 주력무장이 돼고 나서입니다. 그리고 이 시절 레기오나리들의 주적은 바로 사산조 페르시아였습니다. 사실 제정시대 내내 로마제국의 주적은 동방 제국이었지만요. 뭐 결론을 내면 그런겁니다. 이 무거워서 써먹기 힘들고 비싼데다 1회용인 녀석이 좀더 저렴하고 재활용이 가능한 무장으로 바뀐 것은 자신과 길이가 비슷한 무기가 등장하고 나서입니다. 네? 뭔가 이상하다고요? 단창과 투창이 무슨 상관이냐고요? 그것은 바로 파르티아와 로마와의 전쟁에서 필룸이 가진 위치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파르티아와의 전쟁 과정에서 로마 제정은 휘하 군단병들의 필룸 휴대수를 늘리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군단병들은 투덜거리면서도 자신의 월급의 대부분을 가져가는 이 투창을 추가로 사갑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필룸의 목적은 돌격 전 1~2회의 투창입니다. 그리고 적은 자신들보다 돌격에 훨씬 특화됀 카탁프락토이이고요! 도대체 제정은 무슨 생각으로 필룸의 숫자를 늘리라고 했을까요?

  파르티아와 로마의 마지막 전쟁 과정에서 일어난 니시비스 전투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로마 군단병들은 '투창'인 필룸을 던지지 않고 자신들의 방패 사이로 내밀어 적 중기병을 향해 내밉니다. 결과는? 사막의 쨍쨍한 햇빛에 번쩍번쩍 빛나는 필룸의 얇은 날에 겁먹은 파르티아의 군마들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며 도망가고, 결국 그 자랑스런 카탁프락토이는 로마 군단병들에 의해 포위된 채 마름쇠 밭 위에서 로마 군단병들한테 도살당합니다.

  즉, 1.5m~2.5m 정도의 폴암과 같은 짧은 무기들도 충분히 적 기병에 대한 저지력을 갖추고 있으며, 이는 니시비스 전투 이전의 로마 내전에서 폼페이우스의 기병들이 카이사르의 기병에 대해 7배나 많은 숫적 우위를 누림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의 중보병대열에 돌격했다가 필룸앞에서 카탁프락토이들과 같은 꼴이 됐다는 점에서 또다시 증명됩니다.

 중세시절에도 폴암은 그 정도 길이의 무기가 대기병무기로써의 역활에 부족함이 없음을 또 한번 보여줍니다. 장소는 바로 스코틀랜드이죠. 사실 삐라따님도 쉴트론에 대해 언급해주셨고, 저 역시 쉴트론의 최초시도가 해당전투에서 괴멸적인 결과를 불러일으킨 점을 알고 있습니다만, 쉴트론은 자신들에게 다른 방법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윌리엄 하레스가 폴커크전투에서 대패한 뒤, 스코틀랜드의 장수들은 원형 쉴트론이 부적합함을 깨닫습니다. 이 대형은 전혀 기동을 할 수 없게 만들었고, 이는 스코틀랜드보다 압도적인 영국의 궁병세력 앞에서 멈춰있는 장창병들이 화살비에 학살당하여 영국이 굳이 기병을 쓸 필요없이 전열을 붕괴시키게 만드는데 성공합니다. 결국, '쉴트론'이 장창병들이 원형으로 둘러싸여 있는 진형의 의미로써 통하는 현재와 다르게, 스코틀랜드 역사에서 그러한 '원형' 쉴트론이 사용된 사례는 폴커크 전투를 포함해도 단 두번뿐입니다. 그리고 그 두번의 전투 모두 스코틀랜드의 실패로 끝납니다. 그렇다면 스코틀랜드가 실질적으로 채택한, 진짜 '쉴트론'은 무엇인가? 이 쉴트론은 바로 기존의 쉴드월과 후대의 사각방진 사이에 존재하는 '사각 쉴트론'으로써 존재합니다. 여전히 장창병들은, 그들의 그리스의 방계(?) 선조가 그랫듯 전면을 향해 장창을 내민채 전진, 우월한 리치로 영국의 폴암을 든 중보병을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리치 차이로 인해 영국의 중보병들이 밀려나고 이에 대항해 영국이 우월한 기병을 통해 측면 공격을 시작할 때, 그 장창병 전열 측면과 후면에서 새로이 진형을 취한 채 그 기병들의 돌격에 맞서 자신들의 무기의 날을 빛내는 자들은 바로 '폴암병'이었습니다! 네, 폴암=대갑주병기, 파이크=대기병병기라는 통론을 뒤집고 스코틀랜드는 그 정반대의 상황을 시전한 것입니다. 결국 영국의 기병은 스코틀랜드측 보병전열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며, 영국이 믿을 것이라고는 웨일스로부터 끌고 온 장궁병이 됍니다.

  물론 스코틀랜드 독립운동은 기본적인 물량의 차이, 그리고 웨일스 장궁병들이 기병을 대신해 스코틀랜드 보병진에 구멍을 뚫는데 성공함으로써 스코틀랜드의 패색으로 돌아갑니다만, 폴암은 자신의 대기병능력을 충분히 보여줬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만능병기에다 기병 상대에도 별 부족함이 없는 폴암이 강판당할까요?



4. 파이크 (부제: 유럽 장창의 발달사)

  파이크란 무기를 연구할 때, 기존의 서유럽 중심 무기 연구자들이 내놓은 치명적 실패는 바로 그리스 사리사 이후 유럽에서 장창을 찾지 못함으로써 파이크가 '스코틀랜드와 플랑드르에서 갑자기 등장한 대기병무기'로써 인식한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파이크의 직계 조상은 누구일까? 바로, 지금까지 파이크의 방계조상으로 알려져있던 사리사입니다.

  응? 이게 뭔 소리여? 사리사 팔랑크스는 로마에게 디아도코이가 패할 때 강판돼지 않았나? 싶겠지만, 이게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사리사 팔랑크스는 디아도코이의 몰락과 함께 강판당하지 않았으니까요. 로마 군단은 군단병과 비슷한 숫자의 보조병들을 언제나 대동하고 다녔고, 이는 사리사 팔랑크스가 디아도코이의 몰락 이후에도 군단병들의 대기병능력을 높이기 위해 종종 투입돼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현지에서 징집하기 마련인 보조병들이기에, 이 새로운 사리사 팔랑크스가 상대해야 할 자들은 게타에족, 그리고 그 뒤의 고딕족이었습니다.

  비록 고딕족은 아드리아노플에서 비잔틴의 콧등을 부러뜨리기도 했지만, 이들은 항상 그들보다 우세한 비잔틴 제국의 기병, 그리고 전면에서 자신들을 압박해오는 스쿠타토이와 사리사 팔랑크스들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결국, 이들도 장창을 들게 됍니다(!). 이러한 고딕족들은 게르만의 확장과 함께 서로마 지역으로 이동하지만, 고딕족이 프랑크족과 유스티니아누스 휘하의 로마군에게 패망하면서 이들의 전통은 끊기게 됍니다.

  하지만 여전히 유럽에서 장창병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네, 바로 비잔틴 제국입니다. 기존의 비잔틴 제국은 사리사 팔랑크스를 유지했다고 설명했지만, 이들은 이전의 사리사 팔랑크스에 비해 훨씬 경량화돼었습니다. 기동력 좋기로 소문난 로마 군단병들을 보조해주려면 이들 역시 높은 기동력을 보유해야 했으니까요. 결국 사리사 팔랑크스는 스쿠타토이들이 스파타 대신 단창을 들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옛날 그들을 보조해주던 '펠타스트'의 이름을 받은 채 사라지는 듯...이 보였습니다. 네. 10세기 마케도니아 왕조 휘하에서의 대규모 군제 개혁 전에는요.

  니케포루스 황제는 정치적으로 무능했고, 결국 자신의 아내와 부하에게 암살당합니다만, 그의 군사적 능력은 '사라센의 저승사자'라는 별명에 붙여주듯 최고였습니다. 그런 그는 점점 부유해지는 동방제국과 서방 야만족들을 보며 다시 한번 로마의 군단병(이제는 레기오나리가 아닌 스쿠타토이인)들의 무장을 바꿔야 할 것을 통감합니다. 그리고 그가 내린 선택은, 원형의 대형 스쿠톤을 카이트 쉴드 형태의 스쿠톤으로 바꾼 뒤, 기존의 단창을 펠타스트들에게 다시 넘겨주고 자신들은 4~5m에 달하는 장창을 들게 한 것입니다. 네, 다시 한번 장창은 대제국의 주력무장으로써 등장한 것이었습니다.(파이크는 5~6m에 달하니 짧은 거 아니냐고 하는 분들도 계실 지 모르겟지만, 미리 답변드리자면 스코티쉬 파이크도 초창기에는 4~5m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비잔틴 제국과 마케도니아 왕조가 1025년 바실리오스 2세의 죽음과 함께 몰락기에 들어선 뒤에도,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열한 귀족들의 배신에 처참하게 무너져내리기 전까지 굳건히 제국을 지켜냅니다. 그 이후에도 비잔틴은 여전히 스쿠타토이의 육성을 지속하였고, 이러한 비잔틴 장창병의 시대가 끝나는 것은 1204년 콘스탄티노플 강점에서야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비잔틴 장창병들의 눈부신 역사를 목격한 것이 바로 키예프 루스와 북유럽에서 비잔틴의 부를 누리고자 용병으로써 찾아오던 바랑기안입니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는, 유럽의 끝 영국까지 찾아가 자신의 왕국들을 만들다 노르만 왕조에 밀려나 저 스코틀랜드 지방으로 밀려나고 맙니다. 이 한마디면, 파이크가 결코 새로 생겨난 무기체계가 아닌, 어디까지나 '잊혀져가던 무기체계를 다시 복원해낸, 결코 대기병무기로써 그 목적이 정의되지 않았던, 처음부터 다목적병기를 염두에 둔' 사리사의 직계 후손임을 정의할 수 있을 겁니다.

  위에 스코틀랜드 독립운동에서의 폴암의 운용을 다룰 때 언급하였습니다만, 위에서 보듯 스코틀랜드는 결코 파이크를 기병의 접근을 막기 위한 소극적 병기가 아닌, 고대 사리사 팔랑크스가 그랬던 것처럼 전면을 향해 내밀은 후 보조병(여기서는 폴암을 든 병사들이 되겠죠)들에 의해 엄호된 채 적 진영을 향해 전진하는 적극적 병기로써 사용해왔습니다. 그렇다면 언제서야, 파이크는 폴암을 든 보조병들의 도움을 벗어나 전쟁의 꽃이 됄 수 있었을까?

  스위스는 스코틀랜드에서 파이크와 그 운영방법을 받아들이고, 용병 특유의 고도의 훈련을 통해 사각형 쉴트론의 운용에 극한을 보여줍니다만, 이들 역시 아직도 폴암의 도움을 받습니다. 삐라따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지금도 스위스 근위대는 할버드로 무장하고 있고, 그 시절에도, 파이크는 아직 보병 그 자체를 가지진 못합니다.

  파이크가 폴암을 밀어낸 시점은 보통 스위스 용병의 경쟁자, 독일의 란츠크네흐트로 봅니다. 이들은 스위스의 파이크&쉴트론을 배우는 과정에서 파이크와 폴암의 이중으로 이뤄진 복잡한 체계가 그들의 훈련에 걸림돌이 돼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결국 폴암을 강판시키고 파이크병을 고도의 훈련을 통해 사각 모두 커버시키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이는 결국 석궁병이 화승총병으로 대체돼는 과정에서 테르시오라는 진형으로 완성됍니다.

  그렇다면 파이크가 폴암을 밀어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두가지입니다. 우선, 리치입니다. 설명은 간단합니다. 폴암보다 기니, 적 폴암병의 접근을 저지해낼 수 있습니다. 다음은, '훈련하기 간단하다'입니다. 폴암은 여러 날이 뭉쳐있습니다. 당연히, 그 모든 부분을 연계적으로 운용하는 방법을 훈련받아야 합니다. 그에 비해 파이크는 간단합니다. 찌르면 됍니다. 더 필요한가요? 어짜피 대기병 훈련은 둘다 받아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파이크병의 육성비용은 폴암병에 비해 저렴합니다. 상비군이 점점 거대화돼는 시점에서 이런 훌륭한 비용절감을 누가 거절할까요? 결국 파이크는, 테르시오라는 그 절정에 다달어서는, 방패와 검을 든 로델레로(이것마저도 점점 아퀴부지어나 머스캣티어가 대체해갑니다만)이라는 예외를 제외하면 전쟁에 남은 유일한 중장보병으로써 그 마지막 로크루아까지 무적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P.S. 삐라따님과의 토론에 대한 추가 답변

1. 삐라따님과 저 간의 사이에서 과연 'charge of cavalry' 자세가 양손이냐 한손이냐 라는 문제로 토론이 있었습니다. 조사 결과, 란츠크네흐트 초창기에는 'deutschen Stoss'라 불리며 두손으로 잡는 자세였지만, 이후 랜스돌격이 점점 줄어드는 과정에서 굳이 두손으로 잡을 필요가 없어짐에 따라 한손은 칼을 잡는 자세로 변했다고 결론 내릴 수 있었습니다.

2. 삐라따님이 'push of pike'를 예로 들며 파이크의 대보병능력이 안좋다는 얘기를 제시하셨습니다만, 전열의 형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전근대 전쟁에 있어, push of pike를 쌍방간에 강요하며 고정된 전열을 형성시키는 것은 오히려 그 무기가 대보병전에서 유용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당시 대보병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아군 진열이 적 침투에 의해 붕괴돼어 난전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당대 전투를 살펴보면, 난전으로 이어진 전투는 어느 한쪽의 대학살극으로 끝나지만, 그렇지 않은 전투는 승리하든 패배하든 큰 피해를 입지 않은 채 다음 전투를 기약할 수 잇다는 결과로 이어지니까요. 애초에 push of pike라는 병림픽이 발생한 이유도, 서로 장창을 들어 서로의 보병진에 침투하여 난전을 일으키기 힘든 상황에서 어떻게든 적 보병진열에 구멍을 뚫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상 저 링크의 간단한 답변글로부터 시작됀 기병돌격의 발전과 중세 보병의 변천사에 관한 기나긴 글이었습니다. 사실 이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 신 분은 거의 없으시라고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이 여러분의 양식이 돼길 바라며, 이 글이 앞으로 문넷에 등장할 중세 판타지 소설의 고증에 있어 좋은 양식이 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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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48

River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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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에서 토론이 계속 이어지면 많은 분들의 피와 살이 될 자료가 계속 늘어나는건가요?

프레이코드알파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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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히익! 아닙니다. 아닐거에요? 아니...죠?(불안할 얼굴로)

레인시아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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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재밌게 읽었습니다! 근데 다 읽은 후에 이 게시판이 어디인지 순간 헷갈렸...

AUSA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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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좋은글 잘봤습니다. 역덕기질에 요즘 하는게임이 유로파4이다 보니까 설명해주신 부분들이 이해가 잘되네요.&nbsp;</div>

<div><br /></div>유로파4 할때도 보병없는 기병은 그냥 보병의 밥이었는데 우리나라 판타지계에서는 어디서 들어온건지 모르겠지만 기사=중장기병 만능론이 대세가 되버려서....&nbsp;

<div><br /></div>

<div>전쟁관련 판타지에서 그나마 고증좀 챙긴게 요즘껀 박제후작가의 황금 십자가고 다른거는 본적이 없네요....</div>

nick인가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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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양판소야 오러나 마나로 쓱싹하고 썰어버리니까...<br />

삐라따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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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파4의 시대는 파이크 앤 샷 전술이 완성된 시대니 기병이 더이상 보병의 화력과 방어력을 정면으로 당해낼 수 없는 시대가 맞죠.

<div><br /></div>

<div>중세 야전은 중장기병의 전성시대가 맞습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OTL</div>

백만불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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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걸 알고갑니다. <br />

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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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반지의 제왕의 로한 기병들도 톨킨옹이 설정해 두시길 "로한의 말은 굇수라서 뾰족한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하셨죠.

<div>즉 판타지 세계에서 살던 말을 끌고오는게 아닌이상 대기병방진은 유효하다는 의미겠네요.</div>

프레이코드알파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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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 설정 보면서 궁금했던게 '말이 뾰족한 걸 두려워하지 않으면 가시덤불에 찔려 죽을텐데?' 였으니까요(웃음)

<div><br /></div>

삐라따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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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에서는 기병들이 중세식이 아니라 나폴레옹시대식으로 돌격하죠. 다 죽으려고...

핌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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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부분은 연출상의 문제일겁니다. 실제로 돌격 전에 열을 맞춰 랜스를 겨누는 묘사는 있습니다.



<div>진짜로 랜스를 들고 차징해버리면 오크역을 하는 배우의 목숨이 위험하니까요.</div>

삐라따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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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중세식으로 돌격하면 그렇게 웅장한 그림이 나오지는 않을거예요. 제대를 잘게 쪼개서 순서대로 몰아치고,&nbsp;<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적 대열로 뚫고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과껍질 벗겨내듯 랜스로 앞열에 사상자를 낸 다음 뒤로 빠지는 형태로 해야 하거든요.</span>

<div><br /></div>

삐라따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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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장창으로 무장한 동로마 스쿠타토이들을 언급하실때, 스쿠타토이의 주된 역할이 카타프락토이들이 돌격전을 치를 기반이 되는 거점을 야전에서 구축해주는 것이었다는 설명이 누락된 것이 아쉽습니다. 또한 로마제국의 군사제도가 후기와 동로마제국에 이르러서는 '보병군단이 선형의 국경을 방위하고, 기병을 주력으로 하는 전략 예비대를 두어 적을 타격하거나 원정을 치르는 핵심으로 활용한다'로 변화한 것도 누락되었네요.</div>

<div><br /></div>

<div><br /></div>그리고 제가 댓글로 제시했던 의문에 대해서 프레이코드로얄님의 추가적인 답변이 필요한 쟁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div><br /></div>

<div>중세 서유럽 전장에서 파이크가 막 부활한 13세기 말, 기존의 백병전 담당 보병들은 폴암으로 무장했습니다. 파이크가 그렇게 전천후로 약점없는 무기체계였다면, 왜 16세기 파비아 전투 무렵까지 300년의 기간동안 폴암을 비롯한 다른 백병전 무기들을 완전히 도태시키고 일찌감치 표준적인 장비로 자리잡지 못했느냐는 것이 의문입니다. 서유럽의 정치 환경은 자잘한 분쟁들이 자주 일어나는 극심한 경쟁환경이었고, 이러한 경쟁환경에서는 사소하게라도 이점이 있는 무기체계와 전술은 금방 당대의 표준으로 자리잡기 쉽습니다.&nbsp;</div>

<div><br /></div>

<div>여기에 대해서 저는 '<b>파이크는 난전을 벌일 기회를 만들어주는 조커의 역할</b>'+'<b>폴암은 실제 기병을 살상하는 역할</b>'로 분화가 이루어진 것이며, 폴암의 역할이 파비아 전투 이후 총기에게 인계되면서 비로소 백병전 무기가 파이크로 통일되었다는 관점을 제시했습니다.</div>

<div><br /></div>

<div>폴암이 기병에 대해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기병에게 난전이 강요되는 상황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즉 지형과 교전의 성격에 따라 좌우되는 것입니다. 폴암은 아무리 길어도 3미터, 제대로 숙련된 인원이 운용하기에 적당한 수준을 유지하는 정도라면 2미터 내외라는 분명한 물리적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푸레나무로 만든 3미터짜리 창대-중세 유물에 맞게 가장 두꺼운 곳이 직경이 3cm 가량인-를 잡아보시면 거기에 무거운 날을 달고 운용하는 것이 얼마나 인간을 초월한 용력을 필요한 일인가를 체감할 수 있을겁니다.) 유물로나 기록으로나 중세 충격기병의 전술은 그 약점을 정확하게 찌르는 방향으로 발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게중심을 최대한 창 손잡이 뒤쪽으로 빼내고, 창날이 최대한 말머리보다 앞으로 멀리 뻗어나갈 수 있는 중세 랜스 특유의 형상 말입니다.</div>

<div>&nbsp;</div>

<div>리치의 부족으로인해 폴암으로 무장한 중보병은 중세 내내 야전에서 기병에게 맞설 수 없는 상황에 놓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중세 내내 꾸준히 군대 내에서 중보병 비율이 높게 유지되었을까요? &nbsp;</div>

<div><br /></div>

<div>양성 비용도 물론 중요한 이유겠지만...</div>

<div><br /></div>

<div><b>전쟁의 형태가 야지에서 이루어지는 회전만 있는게 아니기 때문이라는 점이 가장 큽니다</b>. 충격기병은 전쟁의 다양한 형태(방어전, 진지전, 공성전, 산악전, 매복, 점령지 유지)에 대응하기에는 융통성이 부족한 병과입니다.&nbsp;</div>

<div><br /></div>

<div>덕분에 반대로 생각해볼 수도 있죠., 비싸고 융통성이 부족한 병과가 중세 내내 찬양받으면서 심혈을 기울여 양성되고 결전을 위한 주력으로 소중하게 여겨졌던 것은, 그만큼 중세의 야전에서 소수의 중기병도 최종병기의 위용을 뿜어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노르만족의 대두에서부터 파비아전투까지. 500년 동안이요. 무려 500년입니다.&nbsp;</div>

<div><br /></div>

<div>지형과 진지의 도움, 매복 기습같은 특수한 상황이 아닌 평범한 야전에서 저 500년의 기간동안 폴암으로 무장한 중보병들에게는 아예 '기회'가 주어지질 않았습니다. 기병의 돌격을 일단 저지하고 난전으로 유도해서 패퇴시킬 기회말입니다. 초창기 화약무기도 똑같았죠. 한 발을 쏴서 제대로 기사를 살상할 수 있는 거리는(30~50m), 곧 돌진하는 기사의 창끝이 2~4초 안에 자신을 꿰뚫을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div>

<div><br /></div>

<div>이러한 가련한 중보병과 초기 화기병들에게 야전에서도 꿈틀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궁리가 파이크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체코에서는 후스파 봉기의 지도자 얀 지슈카 장군이 마차방어진을 도입했죠. 얀 지슈카는 생전에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지만 마차방어진은 파이크와 달리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라집니다. 효과적이었지만 파이크에 비해서는 전략적 기동성과 융통성이 부족했거든요. (제일 첫 머리에 언급한 내용이지만, 유럽의 정치.군사환경은 약간이라도 더 이점이 있는 전술이 쉽게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환경이었습니다.)&nbsp;</div>

<div><br /></div>

<div>Push of pike를 파이크의 약점으로 든 것은 그게 정말로 실제 약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대보병 살상능력은 아주 뛰어납니다. 그러나 '살상능력만' 뛰어난 무기와 전술체계를 완성된 전술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알기쉬운 예로는 유틀란트 해전을 치른 당사국들이 기존의 순양전함(방어력은 순양함, 화력은 전함급!)의 운용과 설계를 모조리 폐기한 사례가 있습니다. 망치를 든 계란끼리 싸우는 것은 양자의 공멸을 부를 뿐이지 어느 한쪽의 승리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조지 실버가 자신의 시대에 유행하던 레이피어를 극렬히 디스한 것도 똑같은 맥락입니다.&nbsp;</div>

프레이코드알파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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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병전에 폴암이 올라간 이유는 제가 위에서 설명 드렸습니다.



<div>란츠크네흐트가 폴암을 버리고 장창으로만 구성하자고 생각하기 전까지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후대의 생각과 달리 무장의 발달이 바로바로 진형에 적용돼지 않습니다. 볼트액션과 재장전이 가능한 총기가 만들어진 뒤로도 한참동안 라인배틀이 펼쳐진 이유가 뭔가요? 다들 대규모로 참호를 파고 산개전을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으니까요. 의외로 높으신분들의 생각은 무기발달에 바로바로 따라가지 못합니다.<br /></div>

<div>그리고 후기 동로마가 군제 개편을 한 것은 중기병의 우위 때문이 아닙니다. 마케도니아 왕조 몰락 후 중산층의 박살로 인해 더이상 중보병을 대규모로 양성해낼 조건이 안돼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콤네누스 왕조의 중산층 및 중보병 포기는 아나톨리아 수복 실패와 함께 콤네누스 왕조의 원죄로써 계속 지적 받습니다.</div>

<div>전쟁에서 중기병이 비싸고 융통성이 부족함에도 양성돼는 이유는 최종병기여서가 아닙니다. 어쨋든 적 보병진열에 구멍을 내 아군 보병진이 적 보병진을 압도함으로써 적을 패퇴시킬 방법,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공격해오는 적 기병을 요격하기 위함으로써 중기병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영국은 중기병 없이 궁병만으로 적 중보병 진열에 구멍을 낸 캐이스입니다. 적 기병의 측면 공격을 막아낼 수 있으며(목책을 통해), 적 중보병 진열에 구멍을 낼 수 있다면(우월한 사정거리를 통해 적 궁병을 걷어낸 후 일방적으로 적 진열에 손실을 강요) 굳이 중기병을 이용할 이유가 없는 케이스도 나온다 이말입니다. 단지 다른나라들은 석궁용병에 의존하였기에 서로 화력의 수평선을 이뤘고, 결국 중기병이란 별도 병과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던 거구요.&nbsp;</div>

삐라따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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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코드로얄님의 의견개진에서 아쉬운 부분은 전술이 변화해가는 짧은 순간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 부분입니다.

<div><br /></div>

<div>잉글랜드가 롱보우를 적극 도입한 것은 대륙 세력에 비해 중기병 전력이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에드워드 1세의 혜안이었고, 이는 에드워드 3세 시대에 백년전쟁 때 빛을 발하긴 합니다. 이건 중세의 가을-황혼기에 해당하는 시기(백년전쟁 개전이 14세기 중반이었죠)라 그 이전까지 있었던 오랜 중기병 우위가 무의미하다가 볼수는 없죠. 또한 롱보우를 중심으로 하는 전술은 지형과 적 지휘관의 수준(..)빨을 극심하게 탔던 관계로, 야전에서 명백한 실패 사례들이 다수 존재합니다. 중보병을 너무 만능으로 평가하시고 계시지만, 중보병이 가진 물리적 한계는 이미 댓글에서 여러차례 언급을 한 바입니다.</div>

<div><br /></div>

<div>볼트액션 소총과 라인배틀의 예시는 배경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올바른 예시라고 볼 수 없습니다. 볼트액션 소총이 개발된 시기는 당대 유럽은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열강들은 메테르니히의 빈체제 하에서 상당한 균형과 안정을 유지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신병기에 걸맞는 신전술이 채택되기에는 경쟁구도 자체가 극심하지 않았던 시대라는 의미입니다. 주요 전투는 주로 열강과 식민지 국가들 사이에 일어났고, 열강들간의 대규모 전투는 보불전쟁이나 크림전쟁등으로 몇차례 일어나지 않았죠.</div>

프레이코드알파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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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트액션의 등장 시기는 보불전쟁과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의 시기입니다. 이미 빈체제가 무너진 이후에요. 잘못 예시를 드셨습니다. 그리고 에드워드 1세는 중기병 전력의 약점을 극복하는 것 역시 목적입니다만, 스코틀랜드 전쟁 시기에도 이미 대규모로 도입돼 적 진열을 붕괴시키는 사례에도 쓰인 바 있습니다. 그리고 중보병을 만능으로 평가하고 한계를 가지고 계시다고 하셨지만, 저 역시 윗 글을 통해 중기병이 가진 한계를 밝혔고, 기병이 결코 야전에서 왕이 아니었음을 주장하는 바입니다. 실제로 중세 랜스 돌격은 최소 4개 이상의 제대의 복합적 연쇄 돌격을 통해 이루어지는 괭장히 복잡한 진형입니다. 단지 스위스 용병과 란츠크네흐트의 등장 전까지는 '기사'의 숙련도가 '맨엣암즈'의 숙련도보다 약간 우수했기에 동등한 수준의 지휘하에서 기병이 약간 유리했을 뿐, 실제 전투는 결국 왕도대로 보병과 기병들간의 충돌 및 보병전열의 측면을 타격하고자 시도하는 기병들의 돌격으로써 이루어져왔음을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div><br /></div>

프레이코드알파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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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 닉네임은 프레이코드알파입니다<img src="/cheditor5/icons/em/em11.gif" alt="" border="0" style="width: 50px; height: 50px; margin: 1px 4px; vertical-align: middle" />

프레이코드알파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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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후스파의 마차가 파이크와 달리 후계자를 남기지 못한 이유는 기동력 부족이라 지적하신 점은 맞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파이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페넥크 전투에서의 패배, 그리고 블랙번 전투가 증명하듯 &nbsp;파이크 역시 승리를 거머쥐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기동해야 합니다. 이건 그리고 세대를 초월하고 모든 중보병의 철칙이고요. 라인배틀시대에도 이동해야 했고, 레기온 시대에도 보병은 이동해야 했습니다.

<div>평범한 야전에서 중보병이 기병을 이길 수 없다고요? 당장 비잔틴이 페체네그족을 상대로, 사산조 페르시아를 상대로 얻어낸 승리는 무엇인가요?</div>

<div><br /></div>

삐라따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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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제가 파이크와 중보병, 중기병의 관계애 대해서 가진 견해의 핵심은 '제병합동'입니다.</div>

<div>각 병과는 자신이 가진 물리적 한계가 뚜렷하기 때문에 그것을 서로 보완하는 협동적 운용 교리가 따라야 제대로 완성된 전술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비잔틴이 페체네그 족과 사산조 페르시아를 상대로 승리한 것은 서로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각 병과들의 제병합동의 성공에서 볼 일이지 '중보병이 주력이라서'로 압축되는 것은 이치에 타당하지 않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다른 병과의 도움을 받지 않는 '중보병만의 부대' '파이크맨만의 부대' '사격전력만의 부대'는 물리적으로 중기병의 손쉬운 먹이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div>

<div><br /></div><br />

프레이코드알파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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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 삐라따님의 의견토론의 중심은 '제병합동'이 아닙니다.

<div>제가 이 글을 통해 반박하고 있는 점은 삐라따님의 '중세 보병은 야전에서 기병에게 우위를 점할 수 없다'라고 하신 점입니다. 저 역시 제병합동이 중요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div>

<div>다만 이것 한가지만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중보병이 없어진 후, 비잔틴제국은 기병의 비율을 크게 높이지만, 기병으로는 결국 보병이 맡던 전투에서의 역활을 메꿀 수 없었음을&nbsp;</div>

삐라따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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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병합동이 이 문제에 대한 제 핵심이라고 꼽은 이유는 '<b>중보병이 기병에게 대응하기 위한 조건</b>'이기 때문입니다.

<div><br /></div>

<div>프레이코드로얄님은<b>&nbsp;'중보병이야말로 대기병전의 주요 전력이고 파이크는 대기병용으로 탄생한 무기라고 볼 수 없다'&nbsp;</b><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라는 입장으로 이 얘기를 시작하셨습니다.&nbsp;</span></div>

<div><br /></div>

<div>저는 거기에 대한 반박으로 <b>'중보병이 기병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난전으로 유도할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gt;'파이크는 바로 그러한 기회를 제공해준다'-&gt;'중보병은 파이크의 도움이 있기에 대기병전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고, 따라서 파이크는 1차적으로 기병에 대항하기 위해 도입 된 것이 맞다' </b>라는 의견을 지금까지 펼쳐놓은 것이고요.</div>

<div><br /></div>

프레이코드알파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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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와의 의견 오류가 대충 이유가 보이는 군요.

<div>저는 애초에 파이크병 역시 중보병이며 중보병은 고대 이래 언제나 전쟁의 중심이 돼어왔다. 중기병은 이러한 전쟁의 중심에서 중보병에 대한 대응책으로 발전해왔으며 파이크 병은 사리사 시절부터 그래왔듯 적 중보병과의 전투를 중점으로 두고 이어져온 장창 계보의 후손이며 대기병임무는 거기에 따라붙은 것이다!라는 의견이고</div>

<div>삐라따님은 중세 전장의 중심은 중기병이며 거기에 중보병들이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파이크를 들었다!라는 입장이신 겁니다. 애초에 전쟁의 중심이 보병이냐 기병이냐에서부터 둘의 의견차가 드러나니 거기서 연계돼는 의견이 점점 벌어지는 것이겠지요.</div>

<div><br /></div>

<div>그리고 제 닉은 프레이코드알파입니다! 프레이코드로얄이 아니에요! 프레이코드알파입니다!프레이코드알파에요! 중요하니까 세번 말씀드릴꺼에요!<img src="/cheditor5/icons/em/em19.gif" alt="" border="0" style="width: 50px; height: 50px; margin: 1px 4px; vertical-align: middle" />&nbsp;</div>

삐라따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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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지금까지 의견이 벌어졌던 지점들



<div><br /></div>

<div>1. 중보병과 파이크병을 저는 독립된 카테고리로 다루었고(무술을 배우는 입장에서, 폴암과 검을 쓰는 병과랑 장창을 쓰는 병과를 똑같이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은 완.전.히 달라요!! 폴암의 활용법은 검술의 연장이고, 본질적으로 검과 방패로 무장한 병사와 다를게 없습니다. 장창은 완전히 독립된 카테고리로 들어가는 무기고요.) 프레이코드<b>알파</b>(...OTL)님은 둘을 같은 카테고리로 놓고 의견을 개진했던 것이군요.



<div><br /></div>

<div>2. 저는 중세 중기병이 <b>유일하게</b>(중요!) 활약할 수 있는 상황을 '<b>기병이 운신하기 좋은 지형에서 벌어지는 회전'이라는 것에동의하고</b>&nbsp;그 이외의 전쟁 상황에서 중기병은 무쓸모나 다름없음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div></div>

<div><br /></div>

<div>즉 야전이 아니라 '전쟁'에서 중요한 병과가 무엇이냐 라고 질문을 바꾸면 저도 두말없이 융통성 높은 보병을 꼽을것이고 그건 프레이코드알파님의 의견이랑 같은게 아닌가 싶습니다.</div>

프레이코드알파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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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무술을 연마하는 입장에서 보는 자라는 점애서의 차이점도 있군요. 저는 해당무기의 운용법이 아닌, 군사사적 시점에서 팔랑기타이-스쿠타토이-파이크맨 모두 당대 수준급의 방어력을 갖춘 방어구를 입고 진열을 갖추어 모루의 역할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파이크병을 폴암병을 포함한 중보병의 카테고리로써 인식하고 있습니다.

프레이코드알파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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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얘기하시며 유틀란트 해전을 언급하신 것은 오류입니다. 유틀란트 해전 이후에도 당장 애드미럴급 순양전함(후드)가 나왔으니 모조리 폐기했다는 전제 자체가 오류시고, 순양전함이 물러난데에는 동등한 기동력에 더 우월한 방어력을 지닌 고속전함이 등장하였기 때문입니다.

<div>그리고 제가 push of pike가 약점이 아니라고 언급한 이유는, push of pike라는 전투방식이 그 궤도에 오른 이유를 살펴서입니다.</div>

<div>push of pike는 일종의 참호전입니다. 적과 아군이 pike간의 간격이라는 참호를 사이에 두고 서로 pike로써 공격을 가합니다. 물론 제3자 입장에서 보면 그 사이에서 죽어나가는게 한심하겠지만, 당사자들에겐 어쩔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다고 pike를 버리고 다른 무기를 드는 순간, 끝까지 사리사 팔랑크스를 전면에서 뚫지 못하고 학살당해야 했던 병사들처럼, pike는 무자비하게 간격 안으로 뛰어든 병사들을 죽일테니까요. 결국 서로 pike를 들어 계속 찔러나가면서, 둘중 하나가 먼저 전의를 잃고 무너뜨릴 때까지 싸우는 방법밖에 답이 없습니다. 이건 약점도 장점도 아니고, 필연적 결과일 뿐입니다. 결론적으로 pike가 없어진 다음의 전투는 사실 push of pike랑 크게 다를 바 없는 선형전투입니다. 망치를 든 계란끼리 싸우는 것이 양자의 공멸을 불러온다고요? 그 양자의 공멸 전에 언젠가는 무너지기 전에 어느 한쪽이 무너질 수 밖에 없는게 전열이고, 당신이 든 것이 글라디우스든 사리사든 파이크든 헬버드든, 결론적으로 전투는 모루간에 충돌해가며 소진해가는 와중에 누구의 망치가 성공하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레이피어를 극렬히 디스하고 파이크를 비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무기 전문가의 견해일뿐, 전략가들에게는 당연히 선택해야 할 무기입니다. 너도 나도 서로에 대한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내가 저녀석이 방어가능한 무장을 드는것은 바보같은 짓입니다.</div>

삐라따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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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sh of pike는 명백하게 지휘관들이 가장 피하고자 했던 상황입니다만... 전략과 전술을 짤 때의 가장 중요한 입장은 아군의 손실은 최소화하면서 적에게 우리의 의도를 강요하는 것이죠. p<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ush of pike 상태는 파이크부대가 군대 전체의 유기적인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고립된 병과가 맞이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상황의 예시입니다.</span>

<div><br /></div>

<div>유틀란트 해전의 중요한 전훈은, 순양전함이 기동성이 좋아도 대응방어가 불가능하다는 약점은 정작 교전에서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온다는 점입니다. 순양전함의 운용 교리는 덕분에 이전처럼 유지할 수 없게 되었지만 기존에 건조중인 순양전함들을 모조리 고철로 만들수는 없으니 방어력을 강화하는 개수를 거쳐서 취역을 시킨다는 선택지도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그렇게 방어력을 강화한 순양전함이 유틀란트 이전의 순양전함과 같은 교리, 같은 원리로 운용되는 배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nbsp;</div>

프레이코드알파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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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피하고자 하는 것이 당연하긴 하죠. 누가 아군의 피해랑 적군의 피해가 비등하게 올라가는 것을 원하겠습니까. 그런데 그걸 회피할 방법이 없잖습니까.

<div><br /></div>

<div>삐라따님께 묻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시점에서 종합적으로 동등한 기량의 적을 만났을때 야전 지휘관이 push of pike를 피할 수 있는 상황은 무엇이 있습니까?</div>

삐라따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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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에 대한 실제 사례를 들겠습니다. 17세기 전장에서 지휘관들은 모든 병과가 종합적으로 투입되어야 하는 회전의 개시 여부를 대단히 신중하게 평가하고 가급적 회피하고자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말로 당대의 지휘관들은 프레이코드알파님이 의문을 표한 대로, 그런 상황을 회피하려고 했어요 =_=;

<div><br /></div>

<div>대신 대규모 회전이 아닌 유격전에 필요한 병과인 기병과 드라군을 확충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덕분에 17세기 전쟁에서 기병과 보병의 비율은 중세를 훨씬 웃도는 1:1에까지 근접하게 됩니다.</div>

프레이코드알파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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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을 피하는 것은 17세기 전장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언제나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범재였던 지휘관들은 언제나 회전을 기피해왔습니다. 이기는 측이든 지는 측이든 피해가 누적됄수밖에 없는게 야전이니까요.



<div>&nbsp;17세기 기병과 드라군의 확충은 부족한 화약과 아직 완전하지 않은 머스킷병의 대기병능력에 의거한다는 의견 또한 존재합니다. 당대 화약은 비싼 물품이었고, 실사격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습니다. 여기에 소켓식 총검 이전의 각종 총검 및 버디슈 등의 무장이 난잡하게 존재하는 체계에서 대기병능력이 약한 건 당연하고요. 그 많고 많은 기병의 확충 결과가 결국 라인배틀에서의 기병의 감소로 이어지는 것을 기억해주십시오. 혼란기의 새로운 시도가 무조건 긍정적인 건 아닙니다.</div>

<div><br /></div>

<div>마지막으로, 그 유격전을 통한 회전 감소의 시도의 결과는 결국 push of pike와 비슷한 전투양상이던 라인배틀입니다.</div>

보급관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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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고나서 댓글을 읽는 순간 이 글은 일단 포럼게로 가는 편이 더 목적에 맞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프레이코드알파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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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지도 모르겠네요.<img src="/cheditor5/icons/em/em21.gif" alt="" border="0" style="width: 50px; height: 50px; margin: 1px 4px; vertical-align: middle" />

베리타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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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틸라 토탈워에서 고딕 파이크맨 보고 얘들이 왜 장창병을 쓰지? 싶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프레이코드알파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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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파이크맨에 대해 최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전에 왜 이놈들만 이렇게 장창병이 발달했나 싶어서 연구를 해보다 보니, 어느새 장창병이, 중보병이, 다이스키!(의미불명)

B사감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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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strike>와패니즈</strike> 추종자로서 유익한 본문과 댓글들이군요. 과열하는 일 없이 잘 마무리 지어졌으면 합니다. &nbsp;<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저 개인적으로 스코틀랜드 독립전쟁~백년전쟁 시기를 파고들었던터라 알듯말듯 반가운 구절들이 많네요. &nbsp;</span><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전술 쪽보다는 정치, 경제 관점으로 치우치긴 했습니다만.</span>

<div><br /></div>

<div>서유럽 보병의 변천사에 중요한 고비는&nbsp;<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에드워드 1세와 이후 백년 전쟁이 아닌가 합니다. </span><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nbsp;종래의 봉건적 군사제도를 청산하고, 대규모 보병전술, 전문 군인의 양성, 기술의 혁신(장궁병 운용 및 대포의 등장)등을 이뤄냈으니까요. 사실 잉글랜드 쪽은 &nbsp;기존의 기병집단, 기사의 유지비용이 드럽게 비싸서&nbsp;</span><span style="line-height: 16.3636px; font-size: 9pt">(에드워드 1세의 주도 하에)&nbsp;</span><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대안책으로 마련하다 보니 나온 쪽이고 프랑스는 백년간의 고독, 아니 능욕 끝에 나온 변혁이긴 합니다만.&nbsp;</span></div>

청풍靑風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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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기병 양성에는 사람의 훈련도 있지만 군마 양성이 가장 힘든 점입니다.</div>마상무예도 겸해서 익히다보니(자주하지는 못하지만) 군마 훈련하는걸 &nbsp;들은적 있습니다.

<div>본래 말은 유순한 동물이고 창검이 나열된 보병진에 돌격하는 짓은 절대 하지 않는건 맞습니다.</div>

<div>군마를 훈련시키는 과정 중에는 포탄과 화약이 터지는 굉음속에서도 말이 동요하지 않도록하는 훈련이 있습니다.</div>

<div>눈가리개를 씌우기도 하고 말이 겁먹지 않는 훈련을 하죠.</div>

<div>서양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네요.</div>

<div>물론 제가 익힌 마상무예의 형태를 볼 때 기병운용이 보병진에 들이 받는 형태로 운용되지는 않았을거 같습니다만....</div>

지평선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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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사가 보병진에 파고&nbsp;들어가서 주변에 있는 보병들을 쓸어버리는, 말하자면 보병진에 탱크가 들어간 수준으로 생각하더군요.... 사실은 보병에 기병이 둘러싸인 순간부터 그냥 게임 오버인데 말이죠.</div>

<div>그렇다고 기병이 보병 없이는 무능하다는 좀 비약이라고 생각하지만요. 대표적으로 몽골군같은 경우는 기병만으로 모든 방진을 작살내고 다니는 행위를 저지는걸로 알고 있고요. </div>

프레이코드알파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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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이 적 보병을 견제해줄 아군 보병이 없을 경우 어떻게 돼는가는 로마-파르티아 전쟁에서 파르티아가 겪은 고초가 말해줍니다. 적의 측면을 치기 위해 계속 빙빙 돌다보니 어느새 적들이 나를 포위하고 있...

뭐 초창기 몽골이 상대했던 것은 기병이 발달한 호라즘과 금이었으니까요. 이후 남송등과의 전쟁을 보면 이미 몽골도 중기병과 보병에서 발전히 심대하게 이뤄진 후이긴 합니다.

행인42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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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장창병-&gt;바랑기안-&gt;스코틀랜드 장창병의 논지는 좀 무리가 아닌지요? 물론 바랑인 용병대의 모집처는 초기의 러시아에서 잉글랜드로 점차 이동하게 됩니다만, 스코틀랜드의 장창병이 바랑기안을 통해 동로마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직계라고 주장하기엔 난점이 지나치게 많은 것 같습니다. 그 논지가 맞다고 가정한다면 왜 초기 바랑인 용병대의 최대의 모집처였던 러시아에서는 장창병이 대두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해야 하며, 후기의 바랑인 용병들을 다수 모집하게 된 지역인잉글랜드에는 정작 장창병이 정착하지 않고 플랑드르와 스코틀랜드에서 서유럽의 장창병이 대두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야 하지요.&nbsp;

<div><br /></div>

<div>게다가, 잉글랜드에서의 바랑인 근위대 모집은 대개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 이후 노르만의 잉글랜드 정복으로 고향을 떠나 온 앵글로색슨인들로 설명되는데, 그렇다면 그들이 귀환해서 자국에 동로마식 군사제도를 전해주었다는 추측은 더욱 인과관계가 헐거워지며, 잉글랜드가 아니라 스코틀랜드로 귀환할 까닭도 불분명하며, 게다가 스코틀랜드에서 장창병의 전면적 도입은 1300년대이기까지 합니다. 바랑기안 친위대 출신 병사들의 영향으로 동로마식 군제가 퍼졌다고 추측할 수 있는 마지막 시점인&nbsp;<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1204년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시점에서 봐도 너무 시기가 늦어요;;</span></div>

프레이코드알파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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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일로 인해 이제서야 답안 올리는 점 죄송하게 생각됍니다.

<div>&nbsp; 우선 잉글랜드에서의 바랑인 근위대 모집이 1066년 이후인 것은 맞습니다만, 잉글랜드로 '유입됀' 바랑기안들은 이전에도 이미 다수 존재하였습니다. 11세기 초반부터 이미 키예프 루스는 과도한 자국 내 정예병력들의 비잔틴으로의 유출을 막기 위해 여러 방법을 시도하였으며, 이미 1030에서 40년대에 '더이상 키예프 루스의 사람들은 바랑기안에 지원할 수 없음'이라는 칙령을 내립니다. 이 이후 바랑기안 근위대의 중심은, 적어도 이 시기 이후부터 70년대까지는, 키예프 루스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듣고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직접 부를 찾아 콘스탄티노플로 오는 노르딕인들로 돼어있습니다. 이중 다수가 잉글랜드로 진출했고, 이들은 헤이스팅스 전투 이후 앵글로색슨과 함께 프랑스 노르망디계의 노르만에게 밀려납니다.(당장 헤이스팅스 전투 직전 하랄드가 격파하고 올라온 노르웨이 왕 하랄2세가 복무 불성실로 인해 파면당한 바랑기안 출신입니다.) 이들은 이미 스코틀랜드에 '존재'하고 있었고, 이들이 바라본 중세 동로마 스쿠타토이들의 모습이, 비잔틴이 자신들보다 기병세력에서 우위인 사라센을 맞이하였듯 자신들이 노르만족의 기병들을 상대하고 있는 시점에서 영향을 끼쳤단 것이 이 글의 논지입니다. 당장 연결돼지 않았다고 직계 후손이 아니라고 할 순 없죠. 사리사 역시 동로마식 장창으로 바뀌며 스쿠타토이들이 들기 직전에는 더이상 팔랑기타이와 같은 중보병이 운용하는 무기가 아니였습니다.</div>

<div>&nbsp; 그리고 저는 '동로마식 군제'가 스코틀랜드에 도입돼었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이 빌려온 것은 어디까지나 파이크의 대기병/보병무기로써의 역할일 뿐, 그들은 이미 중무장 보병을 도입하고 있었고, 스코틀랜드에겐 비잔틴의 트레비존드 궁수도, 강력한 카탁프락토이도 없었습니다. 애초에 제가 설명한 장창을 든 스쿠타토이 중심의 동로마식 군제는 그리스-로마에 이어진 고대식 군세고, 스코틀랜드는 무기만을 받았을 뿐 군제까지 받진 않았습니다.&nbsp;</div>

행인42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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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에 바랑기안을 통해 전래된 것이 동로마의 군제 일반이 아니라 파이크라고 해도 여전히 난점은 그대로가 아닌지요? 언급하신 과정대로 &nbsp;바랑기안을 통한 전래였다면 스코틀랜드보다 북유럽에 먼저 파이크가 전래되어야 했으나 그렇지 않다는 점은 여전히 문제로 남으며, 스코틀랜드 독립전쟁에서 파이크가 대두한 것은 14세기에 이르러서인데 말씀하시는 동로마 전래설을 따르자면 이는 11세기에 일어났어야 하는 일이고, 4차 십자군이 1204년이므로 아무리 늦어도 13세기 초반에는 이뤄졌어야 하는 일입니다.



<div><br /></div>

<div>물론 언급하신 과정과 시기를 통해 비잔틴에서 스코틀랜드로 장창이 유입되었다는 것을 입증할 유물이나 기록이 있다면 특정한 무기체계가 도입되서 주류화되기까지의 과정이 오래 걸렸고 그 유입 과정의 지역들에서는 주류화되는데 실패하기도 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만, 그렇지 않다면 파이크의 동로마 전래설은 파이크가 서유럽에서 자체적으로 발달한 것이라는 주장에 비해 취약할 수 밖에 없는 주장이라고 봅니다.&nbsp;</div>

고도워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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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흥미로운 글이었습니다.

<div><br /></div>

<div>잘보고 갑니다.</div>

사나에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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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즐거운 토론을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나이트해머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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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자료 찾기도 뭐하고 열의가 살아나질 않아서 별로 길게 말할 생각은 없지만, 음... 뭐랄까. 굉장히 고전적인, 그러니까 서양에서 기병 관련 연구가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한국의 자칭 역덕들이 제대로 인식하기 전이었던 한 4~5년 전의 주장을 보는 듯 합니다

<div><br /></div>

<div><br /></div>

<div>왜 그것이 고전적인 주장이 되었고 다시 중세에는 기병이 짱이다~ 라는 분위기가 전개되었는가. 그것에 대해서라면 다음의 링크들이면 충분할 것으로 여겨집니다.</div>

<div><br /></div>

<div>http://zairai.egloos.com/4230637</div>

<div>http://zairai.egloos.com/4556778</div>

<div>http://zairai.egloos.com/4812453</div>

<div>http://zairai.egloos.com/5432262</div>

<div>http://cafe.daum.net/shogun/Ri7/51</div>

<div>http://cafe.daum.net/shogun/4xA8/346</div>

<div><br /></div>

<div>&nbsp;</div>

<div><br /></div>

<div><br /></div>

프레이코드알파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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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역시 해당 자료는 즐겨보고 있습니다. 물론 저는 커닝햄(구 미스터술탄)님의 블로그를 알기 전에 먼저 서양자료로 연구를 한 경우이지만요.

<div>&nbsp; 해당 연구(파이크병의 감소, 파르티아 기병의 통념과 다른 운용방식)는 서양권에서도 역시 인지돼고 있는 바이며, 거기에 대해 많은 토론이 오고가곤 합니다. 그리고 현재 내려지는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div>

<div>&nbsp;'구스타프 아돌프의 선형진 도입과 이후 총병의 증가, 파이크의 감소는 위력이 부족한 아퀴부스 대신 충분한 위력이 있던 머스캣이 점점 운용하기 편리해지면서, 또한 아돌프의 스웨덴군이 도저히 카톨릭군의 push of pike를 버틸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나온 전술이다. 선형진이 실질적으로 파이크를 밀어낼 수 있었던 것은 소캣식 총검의 발달로 머스킷이 주력 중보병의 대보병무기와 대기병무기로써 모두 양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반대로 말하면 소캣식 총검과 경량화의 도입이 이뤄지기 이전의 머스킷은 복잡함과 무거움으로 인한 불리함과 단독으로 운영하였을 때 기병의 근접시도를 막을 수 없는, 아직은 보조적 성격의 무기였음을 뜻한다). 파이크병의 일반적 이미지인 유리한 지형상에 사각방진을 펼친채 버틴다는 이미지와 달리, 야전에서 파이크병들은 전술적 우위를 거둘 수 있는 자리를 얻기 위해 보병 작전술 단위로써의 기동을 끊임없이 계속하였으며, 선형진의 시대에 이것이 머스킷으로 바뀌었을 뿐이다'</div>

나이트해머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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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파이크병의 기동이야 알사람은 이미 한참 전에 알던 이야기지요. 스위스 용병대 관련 기술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게 파이크병의 공세적 운용이었는데 뭐.<br /><br />그런데 그게 기병돌격의 중요성과 중세에서의 기병 주력적 경향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는 거죠.&nbsp;애초에 그건&nbsp;'전장의 주도권을 기본적으로 틀어쥔 기병의 특징을 일부 보병대(물론 그 보병은 스위스 용병대처럼 기병돌격에 주요 부대가 돌파당하고 배너까지 탈취당해 지휘부가 반괴멸에 빠져도 버티는 근성과 차지-귀환-재정비-차지라는 기병돌격의 메커니즘의 빈틈을 노린 신속한 돌격이 가능한&nbsp;그런 부대)도 선보인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거든요.<br /><br />아, 그리고 동로마-바랑기안-스코틀랜드의 메커니즘이라면 왜 '동로마제국의 전성기에 바랑기안의 주요 인적 모집처였던 러시아, 북유럽에서는 장창방진 전통이 나타나지 않았는가' 를 설명하는 게 필요할 듯 합니다. 러시아와 북유럽의 장창방진 전통은 너무나도 빈약해서 최초의 러시아 상비군인 스트렐치도 파이크 방진을 거의 구축하지 않았고&nbsp;스웨덴은 '저것도 파이크 방진이냐' 하는 비웃음을 서유럽 군인들에게서 들어야 했는데, 동로마가 파이크 방진 전통의 기원이라면 왜 그게 이쪽에는 안나타났고 저쪽에만 나타났느냐를 설명해야 하는지라.</p>

프레이코드알파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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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 동로마는 파이크 방진의 전통의 기원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동로마 장창이 파이크와 같은 르네상스 파이크들의 아버지였다는 점이지, 스코틀랜드의 파이크 방진은 동로마의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이어져오던- 쉴드월 전술과는 다른, 스코틀랜드 인들의 독자적 연구입니다.

<div>&nbsp; 아 그리고 북유럽에서 장창방진 전통이 나타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키예프는 전성기에도 몰락기에도 마케도니아나 비잔틴 제국같은 행정체계를 갖추지 못했고(혹은 안한채 연방으로 남길 고집했거나), 그 부귀를 가지고 있던 귀족 계층은 당장 장창이고 뭐고 비잔틴에서 도끼들던 중장병체제를 유지하던 사람들입니다. 즉 이들은 장창방진의 주력인 중보병의 기반인 중산층을 가지지 못했고, 서유럽의 중세 초기와 같은 소수 귀족정예보병 체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근세유럽에 다시한번 이름을 드러내는 시기에, 이들은 사실상 파란눈을 가진 타타르인이라 불릴 정도로 몽골의 영향을 받은 상태였죠. 스트렐치의 시대는 이미 장창이 점점 머스캣에게 밀려날 시기였습니다.</div>

프레이코드알파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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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초창기 기병이 주도권을 틀어쥐었던 것은 서유럽 국가들의 주요 상대가 페체네그 족이나 이슬람 같이 기병-경보병 위주의 유격전을 주로 쓰는 국가였기 때문입니다. 당장 칼날을 서로(서유럽국가)에게 들이민 시점에서 이들이 급격한 중장화를 거친다는 것을 생각해 주십시오.

카산드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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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자 입장에서 유익한 토론이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느냐와 상관없이, 판타지 소설을 쓸 때 여러모로 추가 설정을 도입하여서 써먹을 수 있는 논리들이 마련되어 있네요. 자칫 토론이 과열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두 분 모두한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nbsp;<img src="/cheditor5/icons/em/em7.gif" alt="" border="0" style="width: 50px; height: 50px; margin: 1px 4px; vertical-align: midd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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