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 난세를 살다간 최고의 정치외교가
2017.02.01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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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앞서 김홍집이란 인물을 알게되니 너무 아쉽고 활약에 비해 인지도가 부족한거 같아 안타까워 널리 알리고자 쓰려고 했지만 필력이 부족해 오히려 망칠까 우려돼 정돈이 잘된 네이버캐스트내용을 복붙했습니다 이점 양해바랍니다.
모바일링크가 두개 있는데 위가 네이버지식백과고 밑이 네이버캐스트입니다.
또한 이 인물을 첨 알게된 계기가 엔하위키였는데 신뢰성에 문제가 있는걸 알지만 해당내용에 출처가 있고 또 더 생생히 전달하는데 도움이 될거 같아 나무위키내용을 덧붙입니다. 성실히 자료검색하고 쓰지않아 죄송합니다.
[네이버캐스트 내용]
19세기 후반에 들어와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조선은 붕괴의 길을 가고 있었다. 이 격동의 시기에 정치적 입장은 달랐지만 역사적으로 주목을 받을 만한 인물을 꼽으라면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명성황후 민비, 초대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 1842~1896)을 들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들 중 특히 김홍집은 과거 부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이었지만, 물밀듯이 밀려오는 외세의 압력 속에서 난세를 이끌어가고자 분투했던 인물이라 재평가 되고 있다.
김홍집은 청일전쟁과 갑오경장, 동학 봉기와 아관파천 등 역사의 격변기 속에서 네 번이나 총리대신직을 맡아 국정을 총괄했던 정상급의 개혁 관료였지만,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 직후 고종의 밀명에 따라 정식 재판 없이 경무청 순사에 의해 격살된 뒤 군중들로부터 시신이 짓이겨지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는 왜 국민의 분노와 지탄의 대상이 되어 대역부도를 저지른 인물로 당대의 평가를 받게 되었을까?
1 명망가 출신의 엘리트 관료
1842년(헌종 8) 참판 김영작(金永爵)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김홍집의 어릴 때 이름은 굉집(宏集)이었다고 전한다.
자는 경능(敬能), 호는 도원(道園)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부친인 김영작은 숙종의 장인인 김주신의 5대손으로, 이조ㆍ호조ㆍ예조ㆍ병조 참판을 역임하였고 한성부 좌윤과 사헌부 대사헌, 홍문관 제학을 지낸 인물이다. 그의 어머니는 성혼(成渾)의 후손으로, 한마디로 조선시대 출세를 보장받을 수 있는 명망 있는 가문 출신이었다.
1867년(고종 4) 26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고, 1868년 승정원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에 임명되면서 벼슬길에 나갔다. 그가 처음 출사했을 때 부친인 김영작은 “나라의 녹을 먹는 자는 항상 나랏일에 정성을 기울여 그 책임을 저버려서는 안된다.”고 훈계하였다.
이렇듯 김홍집은 청빈한 선비의 가풍을 이어받아 훗날 재상의 위치까지 여러 차례 올랐음에도 탐관오리의 오명을 한 번도 쓰지 않았다.
김홍집의 30대 시절은 외세의 문호개방 압력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1871년 미국과 충돌하는 신미양요를 겪었고, 급기야 1875년 일본 군함 운양호의 강화도 침입 사건이 빌미가 되어 1876년(고종 13) 일본과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을 맺게 되었다.
강화도조약의 속임수를 깨달은 조선 정부는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새 인물로 김홍집을 발탁하였다.
2 유명세와 악재를 동시에 가져다 준 [조선책략]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최초의 총리대신 김홍집.
김홍집이 본격적으로 조정에서 활약하기 시작한 것은 1880년(고종 17) 3월 예조참의 시절 제2차 수신사로 임명되어 일본을 방문하면서부터다. 이때 그가 해결할 가장 큰 현안은 인천 개항과 관세 징수 교섭이었다.
그는 58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7월 초 도쿄에 도착, 일본 외무성의 이노우에 외상과 만나 현안 타결을 시도했으나, 일본 정부는 겉으로만 환대할 뿐 재협상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본국으로 돌아왔다.
임무 수행엔 실패했지만 일본에 머무는 동안 김홍집은 개화 이후 빠르게 발전한 일본의 신문물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아울러 일본 체류 기간 중에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과 그의 참찬관 황준헌(黃遵憲)과 자주 만났고, 돌아오는 길에 황준헌으로부터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 한 권을 받아 왔다.
이 책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비해 조선, 일본, 청나라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향후 정치ㆍ외교적 파문을 예고했다.
김홍집은 귀국 후 고종에게 일본에서 가져온 [조선책략]을 바쳤다. 책을 받아든 고종은 여러 중신들에게 건네며 검토하게 했는데, 아마도 궁지에 몰린 국제 관계에서 탈출할 수 있는 묘책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비록 수신사 임무는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 김홍집의 처지는 [조선책략] 한권으로 상당한 신망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한편으로 위정척사파들로부터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급진개화파들은 [조선책략]의 내용을 적극 지지하고 나선 반면, 위정척사파들은 이를 계기로 더욱 극렬하게 개화운동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신망과 함께 비난의 화살이 날아오는 혼란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김홍집이 자리하고 있었던 셈이다.
결국 김홍집이 가져온 [조선책략]은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대립만 더욱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조선책략] 내용 중에 ‘천주와 야소가 우리 주자ㆍ육상산과 같다’는 구절은 위정척사파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영남 유생들은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를 통해 “수신사 김홍집이 가져온 황준헌의 [조선책략]이 유포되는 것을 보고 저절로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쓸개가 흔들리며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며 울분을 토했다. 이 일의 파장으로 김홍집은 수차례 사직 의사를 표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인천 개항을 연기시킨 공로에도 불구하고 탄핵 상소가 너무 자주 올라오자 김홍집은 한동안 관직에서 물러나 있어야 했다. 1881년 발발한 위정척사운동이 큰 악재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당시 김홍집은 [조선책략]을 가지고 와 정부가 서양 세력을 끌어들이게 한 장본인으로 지목되어 심한 공격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김홍집은 청나라의 통리아문을 모방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외교통상 업무를 전담하게 되었다.
시급한 외교 실무를 담당할 적임자가 없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통리기무아문은 1880년에 설치된 관청으로, 개항 후의 대외 통상에 대응해 국가의 외교와 군사제도 등을 근대적으로 개혁하기 위한 업무를 관장하던 관청이다. 김홍집은 1882년 봄 조선이 미국, 영국, 독일 등과 차례로 수호통상조약을 맺을 때 전권대신들의 부관으로 협상의 실무를 담당했다. 이로써 흥선대원군의 집권 기간 내내 단단히 잠겨 있던 조선 개화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자의든 타의든 김홍집은 개화의 선봉에 서 있었는데, 외교관으로서 그만한 역량과 경륜을 갖춘 인물이 드물었던 탓이 크다.
3 개화기의 혼란과 정치외교가로서의 활약
1882년 6월에 발발한 임오군란(壬午軍亂)부터 1884년 12월 갑신정변(甲申政變) 전후까지 폭풍 같은 역사적 사건 속에서 김홍집은 사건 수습의 중직을 맡으며 승승장구했다. 당시 임오군란을 주도한 세력은 명성황후 즉, 민씨 정권의 주요 인사들을 처단하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했는데, 정작 개화 세력의 핵심인 명성황후와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를 붙잡는 데 실패했다.
고종은 할 수 없이 흥선대원군을 불러 사태를 수습시켰지만,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는 흥선대원군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급변하고 있었다.
당장 일본으로 피신했던 하나부사 공사가 강화도로 군함을 이끌고와서 임오군란으로 인한 피해를 보상하라고 요구했고, 어쩔 수 없이 흥선대원군은 외교 실무 경험이 풍부한 김홍집을 불러 협상을 주도하게 했다.
그 사이 청나라는 군대를 출동시켜 대원군을 잡아가고 이에 민씨 정권은 다시 부활했다. 대원군과 명성황후 간의 정치적 다툼 속에 김홍집은 전권대신 이유원의 부관 자격으로 일본과의 협상에 임해 굴욕적인 제물포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이 혼란한 시기에 김홍집은 중국 톈진으로 가 흥선대원군의 석방을 교섭하는 활약으로 경기관찰사에 임명되었고. 이어 협판통리아문사무가 되었다.
갑신정변의 뒤처리도 김홍집의 몫이었다. 청나라는 임오군란을 제압한 후에도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고 내정간섭과 함께 개화파들을 탄압했다. 결국 불만을 품은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이 주축이 된 급진개화파들은 1884년 12월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김홍집은 개화 외교의 실력자였지만 정변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개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조정을 대표해 열강과의 대외 교섭에 앞장섰지만, 정권 쟁탈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개화파의 3일천하는 끝났고 김홍집은 다시 한 번 그 뒷수습을 맡았다. 갑신정변은 청과 일본의 간섭만 심해지는 결과를 낳았고, 결국 이를 해결할 적임자는 김홍집밖에 없었다. 김홍집의 주가는 상승하여 우의정에서 좌의정으로 승진했고 외무독판직까지 겸직했다.
일본은 갑신정변의 피해 보상을 요구하며 협상자로 전권대신 이노우에를 내세웠고 이에 맞서 김홍집이 나섰지만, 굴욕적인 한성조약을 체결하는 우를 범했다. 한성조약의 결과에 책임을 통감한 김홍집은 좌의정 자리에서 물러났다.
4 내각의 수반으로서 개혁을 이끌다.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군은 조선의 내정 개혁을 주장했다. 민씨 정권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일본은 당시 동학농민군의 지지를 받고 있던 흥선대원군을 끌어들여 명성황후를 비롯한 민씨 세력을 몰아냈다.
1894년 7월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김홍집이 영의정으로 임명되었는데,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 된 김홍집은 박정양, 김윤식, 유길준 등과 함께 개혁 작업에 착수했고 이것이 이른바 갑오개혁이다. 김홍집은 갑오개혁으로 개편된 관제에 따라 영의정에서 최초의 총리대신이 되었으며, 제1차 김홍집 내각의 수반으로 개혁 작업을 추진해 나갔다.
일본은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의도대로 잘 따라 주지 않자 그를 다시 실각시켰다. 이때 김홍집은 흥선대원군의 편이 되어 옹호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일본은 군국기무처를 해산하고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 등을 귀국시켜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제2차 김홍집 내각)을 출범시켰다.
이들 연립내각은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적 성격을 띤 <홍범 14조>를 발표하는 등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지만, 김홍집은 박영효와의 갈등을 빚어 사임하기도 했다.
흥선대원군의 실각 후 다시 정권을 잡을 기회를 노리던 명성황후를 비롯한 민씨 세력은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러시아와 손을 잡은 후 3국 간섭을 이끌어내 일본을 압박했다. 3국 간섭이란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요동 반도를 점령한 일본에게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철수를 요구한 사건을 말한다. 3국 간섭으로 친러파가 기용된 제3차 김홍집 내각이 들어섰다.
이에 위기를 느낀 일본은 1895년 10월 경복궁에 난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일본은 친러파를 몰아내고 제4차 김홍집 내각을 출범시켰는데, 이때 김홍집은 내각의 수반 자리를 거절했다. 그렇지만 고종이 눈물을 흘리며 부탁하자 어쩔수 없이 맡게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고종은 김홍집 몰래 친러 세력과 함께 거처를 옮기는 이른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뒤늦게 사실을 안 김홍집이 고종을 만나기 위해 급히 러시아 공사관으로 갔지만, 현실은 고종이 내린 체포 명령이었다.
고종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김홍집은 광화문에 이르러 성난 군중에게 둘러싸였다. 명성황후의 시해와 친일 내각이 주도한 단발령 등으로 민심의 분노가 극에 달해 있는 상태였다.
겁을 먹은 수행원들이 일본 군대가 있는 곳으로 피신할 것을 권했지만, 김홍집은 이를 사양했다.
“나는 조선의 총리대신이다. 다른 나라 군대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부지하느니 차라리 조선 백성의 손에 죽는 것이 떳떳하다. 그것이 천명이다.”
이 마지막 말을 남기고 김홍집은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5 김홍집, 역적인가 충신인가
조선 말기 외세 침략의 구실이 된 여러 불평등 조약을 체결할 때 실무를 담당한 김홍집은 사실상 일본의 내정 개혁 요구에 따라 구성된 친일 내각의 수반일뿐이었다. 이런 이유로 김홍집은 매국적 친일파로 가혹한 역사적 평가를 받았다.
개화라는 도도한 흐름과 내우외환이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권력 다툼만 하던 그때에 누군가는 외교 실무를 담당해야 했고, 책임을 져야 했다.
정치외교가로서 김홍집은 최고의 인물이었지만, 시대를 잘못 만난 탓에 그 끝은 불행했다. 명문가의 후예로 비교적 순탄한 관료의 길을 걸은 그는 1880년부터 1893년까지 14년 동안 개화 외교의 중진으로 다사다난한 국내ㆍ국제 정세 속에서 탁월한 실력으로 국내외의 신망을 얻었다.
그러나 50세 고개를 넘은 1894년에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이 터지고 갑오개혁의 총리대신이 된 이후부터 1896년 2월 아관파천의 혼란 통에 비참한 죽음을 당할 때까지 오로지 일제 세력에 진퇴양난만 반복하다 역적의 누명을 쓰고, 결국 정적 친러파의 손에 쓰러지는 운명을 맞이하고 말았다.
[나무위키 내용중]
이런 틈에 끼어 있던 김홍집은 을미개혁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결국 욕이란 욕은 다 먹게 되었다. 이 때 김홍집은 국모 시해의 책임을 지고 자결을 하려 했으나 대감이 죽어서 이 일이 해결된다면 모르겠으나 실상은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유길준의 만류로 그만뒀다.
백성들의 일관된 여론인 반일, 반외세에 이제 국모 암살과 연루되었다는 의혹으로 욕까지 먹게 되었으니 이것으로 김홍집의 운명도 대충 정해졌다. 김홍집은 총리대신으로서 내각에 참여할 것을 수락할 때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던 것 같다. 총리대신 수락을 반대하는 가족들에게 "이 난세에 상감께서 잠을 못 이루고 조르시니 어찌 내 한 몸이나 아끼려고 거부할 수 있겠느냐? 부득이 어명대로 승낙했으니 내 생명은 이미 각오한 바이다. 너희들도 미리 짐작하여라"라고 못박았다고 한다.
시인이자 사학자로서 죽기 전까지 친일파 연구를 해왔던 임종국씨는 김홍집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김홍집의 최후가 이렇게 숙연하거늘 어느 누가 그를 친일파라고 욕하겠는가? '일국의 총리로서 동족에게 죽는 게 '천명'이라고 갈파한 살신성인의 투철한 정치 책임으로 '일본의 앞잡이'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점에서 김홍집을 '한말의 위대한 정치가'라고 평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끝-
물론 이 사람도 결점이 있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싫어할만한 이유는 있을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정도의, 박규수와 집안간 왕래가 있어 영향을 받은 개화파에, 혼란한 시기에도 여러 당파들을 잘 조율하며 개혁을 이뤄낸 너무도 아까운 인물이 안타깝게 죽은 사실이 슬퍼서요.
전 고종에 대해 초기엔 암군이지만 말년엔 노력을 한 인물로 알고 있는데 김홍집에 대해 알면 참으로 한심한거 같습니다. 괜히 군밤커피란 비아냥을 듣는게 아니구나 싶더군요.
역사에 if란 없고 또 그런거 일일이 생각할수록 세상에 아쉬운거 없는게 어딨겠나 싶지만 김홍집에게 힘을 실어주고 개항을 했으면 보다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이런 인물을 속이고 죽인 고종에게 화가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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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에 들어와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조선은 붕괴의 길을 가고 있었다. 이 격동의 시기에 정치적 입장은 달랐지만 역사적으로 주목을 받을 만한 인물을 꼽으라면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명성황후 민비, 초대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 1842~1896)을 들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들 중 특히 김홍집은 과거 부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이었지만, 물밀듯이 밀려오는 외세의 압력 속에서 난세를 이끌어가고자 분투했던 인물이라 재평가 되고 있다.
김홍집은 청일전쟁과 갑오경장, 동학 봉기와 아관파천 등 역사의 격변기 속에서 네 번이나 총리대신직을 맡아 국정을 총괄했던 정상급의 개혁 관료였지만,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 직후 고종의 밀명에 따라 정식 재판 없이 경무청 순사에 의해 격살된 뒤 군중들로부터 시신이 짓이겨지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는 왜 국민의 분노와 지탄의 대상이 되어 대역부도를 저지른 인물로 당대의 평가를 받게 되었을까?
1 명망가 출신의 엘리트 관료
1842년(헌종 8) 참판 김영작(金永爵)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김홍집의 어릴 때 이름은 굉집(宏集)이었다고 전한다.
자는 경능(敬能), 호는 도원(道園)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부친인 김영작은 숙종의 장인인 김주신의 5대손으로, 이조ㆍ호조ㆍ예조ㆍ병조 참판을 역임하였고 한성부 좌윤과 사헌부 대사헌, 홍문관 제학을 지낸 인물이다. 그의 어머니는 성혼(成渾)의 후손으로, 한마디로 조선시대 출세를 보장받을 수 있는 명망 있는 가문 출신이었다.
1867년(고종 4) 26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고, 1868년 승정원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에 임명되면서 벼슬길에 나갔다. 그가 처음 출사했을 때 부친인 김영작은 “나라의 녹을 먹는 자는 항상 나랏일에 정성을 기울여 그 책임을 저버려서는 안된다.”고 훈계하였다.
이렇듯 김홍집은 청빈한 선비의 가풍을 이어받아 훗날 재상의 위치까지 여러 차례 올랐음에도 탐관오리의 오명을 한 번도 쓰지 않았다.
김홍집의 30대 시절은 외세의 문호개방 압력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1871년 미국과 충돌하는 신미양요를 겪었고, 급기야 1875년 일본 군함 운양호의 강화도 침입 사건이 빌미가 되어 1876년(고종 13) 일본과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을 맺게 되었다.
강화도조약의 속임수를 깨달은 조선 정부는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새 인물로 김홍집을 발탁하였다.
2 유명세와 악재를 동시에 가져다 준 [조선책략]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최초의 총리대신 김홍집.
김홍집이 본격적으로 조정에서 활약하기 시작한 것은 1880년(고종 17) 3월 예조참의 시절 제2차 수신사로 임명되어 일본을 방문하면서부터다. 이때 그가 해결할 가장 큰 현안은 인천 개항과 관세 징수 교섭이었다.
그는 58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7월 초 도쿄에 도착, 일본 외무성의 이노우에 외상과 만나 현안 타결을 시도했으나, 일본 정부는 겉으로만 환대할 뿐 재협상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본국으로 돌아왔다.
임무 수행엔 실패했지만 일본에 머무는 동안 김홍집은 개화 이후 빠르게 발전한 일본의 신문물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아울러 일본 체류 기간 중에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과 그의 참찬관 황준헌(黃遵憲)과 자주 만났고, 돌아오는 길에 황준헌으로부터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 한 권을 받아 왔다.
이 책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비해 조선, 일본, 청나라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향후 정치ㆍ외교적 파문을 예고했다.
김홍집은 귀국 후 고종에게 일본에서 가져온 [조선책략]을 바쳤다. 책을 받아든 고종은 여러 중신들에게 건네며 검토하게 했는데, 아마도 궁지에 몰린 국제 관계에서 탈출할 수 있는 묘책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비록 수신사 임무는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 김홍집의 처지는 [조선책략] 한권으로 상당한 신망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한편으로 위정척사파들로부터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급진개화파들은 [조선책략]의 내용을 적극 지지하고 나선 반면, 위정척사파들은 이를 계기로 더욱 극렬하게 개화운동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신망과 함께 비난의 화살이 날아오는 혼란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김홍집이 자리하고 있었던 셈이다.
결국 김홍집이 가져온 [조선책략]은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대립만 더욱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조선책략] 내용 중에 ‘천주와 야소가 우리 주자ㆍ육상산과 같다’는 구절은 위정척사파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영남 유생들은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를 통해 “수신사 김홍집이 가져온 황준헌의 [조선책략]이 유포되는 것을 보고 저절로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쓸개가 흔들리며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며 울분을 토했다. 이 일의 파장으로 김홍집은 수차례 사직 의사를 표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인천 개항을 연기시킨 공로에도 불구하고 탄핵 상소가 너무 자주 올라오자 김홍집은 한동안 관직에서 물러나 있어야 했다. 1881년 발발한 위정척사운동이 큰 악재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당시 김홍집은 [조선책략]을 가지고 와 정부가 서양 세력을 끌어들이게 한 장본인으로 지목되어 심한 공격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김홍집은 청나라의 통리아문을 모방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외교통상 업무를 전담하게 되었다.
시급한 외교 실무를 담당할 적임자가 없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통리기무아문은 1880년에 설치된 관청으로, 개항 후의 대외 통상에 대응해 국가의 외교와 군사제도 등을 근대적으로 개혁하기 위한 업무를 관장하던 관청이다. 김홍집은 1882년 봄 조선이 미국, 영국, 독일 등과 차례로 수호통상조약을 맺을 때 전권대신들의 부관으로 협상의 실무를 담당했다. 이로써 흥선대원군의 집권 기간 내내 단단히 잠겨 있던 조선 개화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자의든 타의든 김홍집은 개화의 선봉에 서 있었는데, 외교관으로서 그만한 역량과 경륜을 갖춘 인물이 드물었던 탓이 크다.
3 개화기의 혼란과 정치외교가로서의 활약
1882년 6월에 발발한 임오군란(壬午軍亂)부터 1884년 12월 갑신정변(甲申政變) 전후까지 폭풍 같은 역사적 사건 속에서 김홍집은 사건 수습의 중직을 맡으며 승승장구했다. 당시 임오군란을 주도한 세력은 명성황후 즉, 민씨 정권의 주요 인사들을 처단하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했는데, 정작 개화 세력의 핵심인 명성황후와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를 붙잡는 데 실패했다.
고종은 할 수 없이 흥선대원군을 불러 사태를 수습시켰지만,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는 흥선대원군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급변하고 있었다.
당장 일본으로 피신했던 하나부사 공사가 강화도로 군함을 이끌고와서 임오군란으로 인한 피해를 보상하라고 요구했고, 어쩔 수 없이 흥선대원군은 외교 실무 경험이 풍부한 김홍집을 불러 협상을 주도하게 했다.
그 사이 청나라는 군대를 출동시켜 대원군을 잡아가고 이에 민씨 정권은 다시 부활했다. 대원군과 명성황후 간의 정치적 다툼 속에 김홍집은 전권대신 이유원의 부관 자격으로 일본과의 협상에 임해 굴욕적인 제물포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이 혼란한 시기에 김홍집은 중국 톈진으로 가 흥선대원군의 석방을 교섭하는 활약으로 경기관찰사에 임명되었고. 이어 협판통리아문사무가 되었다.
갑신정변의 뒤처리도 김홍집의 몫이었다. 청나라는 임오군란을 제압한 후에도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고 내정간섭과 함께 개화파들을 탄압했다. 결국 불만을 품은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이 주축이 된 급진개화파들은 1884년 12월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김홍집은 개화 외교의 실력자였지만 정변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개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조정을 대표해 열강과의 대외 교섭에 앞장섰지만, 정권 쟁탈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개화파의 3일천하는 끝났고 김홍집은 다시 한 번 그 뒷수습을 맡았다. 갑신정변은 청과 일본의 간섭만 심해지는 결과를 낳았고, 결국 이를 해결할 적임자는 김홍집밖에 없었다. 김홍집의 주가는 상승하여 우의정에서 좌의정으로 승진했고 외무독판직까지 겸직했다.
일본은 갑신정변의 피해 보상을 요구하며 협상자로 전권대신 이노우에를 내세웠고 이에 맞서 김홍집이 나섰지만, 굴욕적인 한성조약을 체결하는 우를 범했다. 한성조약의 결과에 책임을 통감한 김홍집은 좌의정 자리에서 물러났다.
4 내각의 수반으로서 개혁을 이끌다.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군은 조선의 내정 개혁을 주장했다. 민씨 정권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일본은 당시 동학농민군의 지지를 받고 있던 흥선대원군을 끌어들여 명성황후를 비롯한 민씨 세력을 몰아냈다.
1894년 7월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김홍집이 영의정으로 임명되었는데,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 된 김홍집은 박정양, 김윤식, 유길준 등과 함께 개혁 작업에 착수했고 이것이 이른바 갑오개혁이다. 김홍집은 갑오개혁으로 개편된 관제에 따라 영의정에서 최초의 총리대신이 되었으며, 제1차 김홍집 내각의 수반으로 개혁 작업을 추진해 나갔다.
일본은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의도대로 잘 따라 주지 않자 그를 다시 실각시켰다. 이때 김홍집은 흥선대원군의 편이 되어 옹호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일본은 군국기무처를 해산하고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 등을 귀국시켜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제2차 김홍집 내각)을 출범시켰다.
이들 연립내각은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적 성격을 띤 <홍범 14조>를 발표하는 등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지만, 김홍집은 박영효와의 갈등을 빚어 사임하기도 했다.
흥선대원군의 실각 후 다시 정권을 잡을 기회를 노리던 명성황후를 비롯한 민씨 세력은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러시아와 손을 잡은 후 3국 간섭을 이끌어내 일본을 압박했다. 3국 간섭이란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요동 반도를 점령한 일본에게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철수를 요구한 사건을 말한다. 3국 간섭으로 친러파가 기용된 제3차 김홍집 내각이 들어섰다.
이에 위기를 느낀 일본은 1895년 10월 경복궁에 난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일본은 친러파를 몰아내고 제4차 김홍집 내각을 출범시켰는데, 이때 김홍집은 내각의 수반 자리를 거절했다. 그렇지만 고종이 눈물을 흘리며 부탁하자 어쩔수 없이 맡게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고종은 김홍집 몰래 친러 세력과 함께 거처를 옮기는 이른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뒤늦게 사실을 안 김홍집이 고종을 만나기 위해 급히 러시아 공사관으로 갔지만, 현실은 고종이 내린 체포 명령이었다.
고종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김홍집은 광화문에 이르러 성난 군중에게 둘러싸였다. 명성황후의 시해와 친일 내각이 주도한 단발령 등으로 민심의 분노가 극에 달해 있는 상태였다.
겁을 먹은 수행원들이 일본 군대가 있는 곳으로 피신할 것을 권했지만, 김홍집은 이를 사양했다.
“나는 조선의 총리대신이다. 다른 나라 군대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부지하느니 차라리 조선 백성의 손에 죽는 것이 떳떳하다. 그것이 천명이다.”
이 마지막 말을 남기고 김홍집은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5 김홍집, 역적인가 충신인가
조선 말기 외세 침략의 구실이 된 여러 불평등 조약을 체결할 때 실무를 담당한 김홍집은 사실상 일본의 내정 개혁 요구에 따라 구성된 친일 내각의 수반일뿐이었다. 이런 이유로 김홍집은 매국적 친일파로 가혹한 역사적 평가를 받았다.
개화라는 도도한 흐름과 내우외환이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권력 다툼만 하던 그때에 누군가는 외교 실무를 담당해야 했고, 책임을 져야 했다.
정치외교가로서 김홍집은 최고의 인물이었지만, 시대를 잘못 만난 탓에 그 끝은 불행했다. 명문가의 후예로 비교적 순탄한 관료의 길을 걸은 그는 1880년부터 1893년까지 14년 동안 개화 외교의 중진으로 다사다난한 국내ㆍ국제 정세 속에서 탁월한 실력으로 국내외의 신망을 얻었다.
그러나 50세 고개를 넘은 1894년에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이 터지고 갑오개혁의 총리대신이 된 이후부터 1896년 2월 아관파천의 혼란 통에 비참한 죽음을 당할 때까지 오로지 일제 세력에 진퇴양난만 반복하다 역적의 누명을 쓰고, 결국 정적 친러파의 손에 쓰러지는 운명을 맞이하고 말았다.
[나무위키 내용중]
이런 틈에 끼어 있던 김홍집은 을미개혁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결국 욕이란 욕은 다 먹게 되었다. 이 때 김홍집은 국모 시해의 책임을 지고 자결을 하려 했으나 대감이 죽어서 이 일이 해결된다면 모르겠으나 실상은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유길준의 만류로 그만뒀다.
백성들의 일관된 여론인 반일, 반외세에 이제 국모 암살과 연루되었다는 의혹으로 욕까지 먹게 되었으니 이것으로 김홍집의 운명도 대충 정해졌다. 김홍집은 총리대신으로서 내각에 참여할 것을 수락할 때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던 것 같다. 총리대신 수락을 반대하는 가족들에게 "이 난세에 상감께서 잠을 못 이루고 조르시니 어찌 내 한 몸이나 아끼려고 거부할 수 있겠느냐? 부득이 어명대로 승낙했으니 내 생명은 이미 각오한 바이다. 너희들도 미리 짐작하여라"라고 못박았다고 한다.
시인이자 사학자로서 죽기 전까지 친일파 연구를 해왔던 임종국씨는 김홍집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김홍집의 최후가 이렇게 숙연하거늘 어느 누가 그를 친일파라고 욕하겠는가? '일국의 총리로서 동족에게 죽는 게 '천명'이라고 갈파한 살신성인의 투철한 정치 책임으로 '일본의 앞잡이'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점에서 김홍집을 '한말의 위대한 정치가'라고 평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끝-
물론 이 사람도 결점이 있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싫어할만한 이유는 있을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정도의, 박규수와 집안간 왕래가 있어 영향을 받은 개화파에, 혼란한 시기에도 여러 당파들을 잘 조율하며 개혁을 이뤄낸 너무도 아까운 인물이 안타깝게 죽은 사실이 슬퍼서요.
전 고종에 대해 초기엔 암군이지만 말년엔 노력을 한 인물로 알고 있는데 김홍집에 대해 알면 참으로 한심한거 같습니다. 괜히 군밤커피란 비아냥을 듣는게 아니구나 싶더군요.
역사에 if란 없고 또 그런거 일일이 생각할수록 세상에 아쉬운거 없는게 어딨겠나 싶지만 김홍집에게 힘을 실어주고 개항을 했으면 보다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이런 인물을 속이고 죽인 고종에게 화가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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