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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후삼국 시기 탐라(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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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수업때 잘 언급되지 않지만 이때 탐라는 독립된 상태였습니다.
다만 독립이라고는 해도 신라가 강성할때는 신라의 제후국에 가까운 수준이었습니다.

아무래도 탐라의 입장에선 먼 당나라나 일본보단 가까운 신라와 친하게 지낼수 밖에 없으니까요.
이때문에 탐라는 매번 신라에 조공을 보냈는데

경직왕 시절.

삼한일통을 하며 엄청난 기세를 떨치던 신라가 다시 삼국시대때마냥 분열이 되기 시작하자 사정이 달라지게 됩니다.

대략 892년 이시기 신라는 전국시대마냥 호족들이 자기가 왕이라면서 날뛰던 시기인지라 신라의 지배력은 경주일대에 국한되어서 탐라에서 신라로 까지 가는 길목이 사실상 쇄운(운행이 중단,불가능)하게 됬습니다.

물론 탐라가 자력으로 호위하는 병력을 보낸다면 될지도 모르지만 굳이 그래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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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이때 견훤, 무진주를 치고 완산주에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된 시기입니다.
이렇게 되자 탐라는 신라의 눈치를 볼것없이 완전히 따로 놀게 됩니다.

근데 이때 중국도 막장 태그를 타기 시작합니다.

그 일례가

서기895년.

당나라에서 난을 일으킨 자의 병선이 태풍에 휘말려 탐라로 표착하게 됩니다.
탐라국 경직왕은 그들을 검거하고 중국으로 송환시킵니다.(사실상 당나라로 송환시켜 당나라에게 밉보이기 싫다는 의미라고 할수 있겠죠.)

문제는 이때 송환시키면서 중원의 막장사정을 봤는지 이때부터는 본격적으로 따로 놀기 시작. 

중국으로 사람도 보내고 한반도도 끊임없이 관찰하기 시작합니다.

서기918년 민왕치세

탐라, 오월(吳越)에 사신을 보내 말(馬)을 바침.

경직왕 이후 민왕 시절.

오월국(후백제가 중원에 사신을 보냈던 국가중 하나.)에 사신을 보내 말을 바치기도 하는등 이미 오대십국의 국가들에게 눈도장을 찍으려고도 합니다.


그리고 서기 925년 민왕시절

탐라, 고려에 사신을 보내 방물(方物)을 바침.

 


근데 의외인게 삼국시대 시절 탐라랑 친한건 백제였는데
 

정작 후삼국시대때 탐라가 친하게 지낸 것은 백제의 후계국인 후백제가 아닌 탐라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고려.

그 먼곳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치는등 친하게 지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나주지역은 고려 땅이니 땅만 놓고 보면 고려가 가까울수도 있지만 사신이 오고 갈경우 수도로 오고 가는게 상식인데 고려의 수도는 탐라기준으로 가장 먼 송악.)

이때가 고창 전투나 운주 전투 이후라면 모르겠지만 이때 당시엔 공산전투까지는 아니더라도 후백제가 나름 승기를 보이고 있던 때라는 것.


즉,탐라국의 민왕은 후삼국의 판도가 고려가 약간 밀리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고려쪽에 손을 들었다는게 되죠.자세한 기록이 없어서 확신은 못하지만 만약 저때 상황을 알고도 저런 것이면 뛰어난 식견이 아니라고 할수 없는 선택입니다.


이후


서기938년. 자견왕 시절

탐라 태자 고말로를 입조(직접 조공하러 감.)시키는 것으로 고려에 항복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고려는 빠르게 눈치를 줄을 타고 후삼국후 태자를 직접 입조시켜 보낸 것이 갸륵한 것인지

탐라국을 직할 지배를 하지 않고는 그냥   왕호를 성주로 바꾸게 하는 선으로 국가를 존속시켜줍니다.


 


 


지금보면 몽고 항쟁후 고려가 몽골 후계자들 사이 눈치보고 줄잘선덕분에 외왕내제에서 제후국으로 바뀌고 멸망을 피한 케이스랑 비슷하기도 합니다.


 


 



이후 탐라국은 왕정시대가 끝이 나고 태자 고말로부터는 성주시대가 도래하게 됩니다.


여담이지만 후백제의 견훤은 중원과 여러 나라들과 손을 잡으려고 했지만

후당과 후량은 너무 멀어서 도움 받기 힘들고 거란에는 사신을 겨우 보냈지만 도착하기도 전에 태풍으로 몰살.

이후 거란과 외교 기록은 없지만 수교는 했다고 해도 거란 쪽도 사정이 바쁜지라 고려 압박에는 전혀 도움이 안되고


마지막으로 믿었던 백제의 혈맹국인 일본 마저 일본 난민을 구해줘놓고도 입국거절이라는 초후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면서 해외 세력과의 군사적 도움은 일절 받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오월국과는 제대로 수교를 한듯 했지만 이또한 군사적 도움은 없었습니다.

결국 후백제는 동쪽으론 신라,북쪽으론 고려.전조(삼국시대 백제)시절 친했던 남쪽의 탐라마저 자신들이 아닌 고려와 친하게 지내면서 사실상 자신들과 다른 노선으로 가겠다고 표현한 것이니...



후백제 입장에선 피눈물을 흘릴수 밖에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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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후백제의 외교 능력이과 성과가 전혀 없던 것은 아닌지라 해외세력은 아니지만 한반도 내부에는 경상도 강주의 왕봉규라는 거대 세력이 그나마 강력하여 고려를 견제하는등 군사적으로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이또한 왕봉규의 자식(?)농사 실패로 고려에게 먹히게 되며 끝이 났습니다.

울어도 좋다.견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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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10

abc3511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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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탐라는 후백제가 나주에서 후고구려에게 어떻게 털렸는지 아니까 그런 것일 수 있죠.</p>

불타는감자밭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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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그런데 탐라가 고려에 방물을 보낸건 925년.



후고구려 나주 공방전으로부터 한참 지난시기이며 고려가 조물성 전투 이후 후백제에게 약간 눌리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당시엔 전라도쪽은 물론이고 경상도쪽도 친백제계가 많고 남해를 사실상 석권하다 시피한 거대 세력 왕봉규도 후백제=강주=신라 노선(이 마저도 후백제에 더 치우쳐있고 고려와는 적대) 상태라 나주쪽 서해 빼면 후백제가 지배권을 공고히 했을때입니다.



물론 나주만은 고려가 근근히 지키고 있을때지만 굳이 나주->후백제 해상->예성강->송악 루트로 가는 것을 택한 것은 많이 번거로운 거긴 합니다.



이시기면 탐라로선 나름 승부수를 띄운거지요.



만약 굳이 우위점을 보고 했다면

나주 공방전 보다는 민심(이라 쓰고 신라랑 아자개등 중부권 호족들이 고려에 편으로 들어감)이 고려쪽이라 것에 줄타기 한게 더 설득력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나주쪽에 고려 세력이 있으니 후백제를 견제할것이라는 생각도 했을지 모르지만요.

abc3511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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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네 물론 신라랑 아자개등 호족들이 고려 편에 들어간 것도 큰 요소 중 하나겠지만, 길게 보면 이미 후고구려에게 후백제는 턱 밑인 나주조차 공략당한 전례가 있는 만큼 기본 국력에서는 후백제가 명백히 이하라는 생각을 강하게 가졌을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br /><br />후백제가 세력이 흥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중부 지방의 여러 요충지들을 공략해서 송악을 위협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신라를 완전히 점령한 상황도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결국 기본 체급에서 차이가 나니까 이대로 가면 고려가 이기는 것은 명약관화하다고 판단한 것이겠죠.<br /><br />이는 훌륭한 선견지명이기도 했구요.</p>

불타는감자밭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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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사실 나주공방전으로<strong>&nbsp;925년 기준이면&nbsp; </strong>나주 공방전으로 얻었던 지역 일대는 정말로 나주 쪽 한정으로 줄어들고 경남의 왕봉규는 독자적으로 혹은 후백제와 함께 고려 수군따윈 안중에도 없이 중국으로 사신을 보내기도 했거든요.<br /><br />사실 중부쪽(상주 말고 옆&nbsp;충청남도전라북도&nbsp;지역)은 후백제 쪽도&nbsp;많아서 고려도 마찬가지였거든요.&nbsp;<br /><br />고려 입장에서 막강한 후백제야 그렇다치지만 왕봉규까지 못막은거 보면 이시기는 후고구려때랑 달리 후백제 황해 지역 일대랑 경남 남해 일대는 정말로 고려-나주 말고는 영향력을 주기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br /><br />또한 이때 국제적 위상과 국력차이는 <br /><br /><strong>고려&gt;후백제가 아니라 후백제&gt;고려+신라</strong>(이때 당시엔 그나마 나라 구실은 했습니다.)였고 <strong>신라에서도 그걸 알고 기죽지말고 공격해달라는&nbsp;사신을 보내기도 했습니다.<br /></strong><br />또한 고려가 남진을 계속 할지도 미묘한게 후고구려때 무리한 북진 정책을 했고 <br />심지어 고려와 친하게 지내는 신라마저 이녀석들은 그나마 적게 혹은 온화하게 할거야라고 판단했으며 후백제 또한&nbsp;조물성전투에서 우위를 점하고도 고려는&nbsp;신라처럼 양립못하는 사이도 아니니 더이상 공격하지 말자라고 판단했으니까요.<br /><br />이때문에 신라는 똥줄타서 절대 믿지말고 공격해달라고 촉구하고 왕건은 지금은 무리라는 걸 부드럽게 돌려서 사신을 보냈을 정도입니다.<br /><br />덧붙여 고려의 중부 세력도 편입했다고 뭐하고 체급차이라고도 뭣한게&nbsp;이때 당시 중부쪽 고려의 5분의 1 정도의<strong>&nbsp;가장 큰 세력이던 명주 김순식은 여전히 반 독립적인 상태라 고려에서도 경계대상이었습니다.<br /><br /></strong>이렇게 본다면 당시 체급은 저위 지도에 있는 것의 3분의 2혹은 5분의 3정도밖에 안되는데다가 (반대로 후백제는 나주일대만 빼면 대략 맞습니다.저 지도상 경남일대를 신라로 되어 있는데 저긴 왕봉규 및&nbsp;강주,상주 호족들지역이라 지도상에선 신라 영토에서 빼는게 맞는지라...&nbsp;)<br /><br />고창일대 호족들에 이르러선 친 신라였었고요.<br /><br />만약 정말로 나주 공방전이&nbsp;교류의 핵심이었다면 903년.909~914<br /><br />가장 굵직한것들만 봐도 910년 나주 일대 유명 해적인<strong> 능창 제압작전 </strong>성공이나 <strong>견훤과 싸운 912,914년이 </strong>적절합니다.<br /><br />왜냐하면 이때는 <strong>강주 쪽에서도 (왕봉규는 아니고 다른 호족) 후고구려에 지원을&nbsp;</strong>보내기도 했거든요.<br /><br />그런데 정작 방물을 바친 것은 왕건 즉위때도 아닌 조물성 전투 이후인거지요.<br /><br />이때문에 탐라가 고려를 택한 것은 대략 3개를 유추할수 있습니다.<br /><br />1.사실 <strong>태봉전이나 왕건 즉위때 보냈는지만 기록이 없는 것.<br /></strong><br />2.당시 <strong>탐라가 그저 보존하는데 그치는게 아니라 반도 진출을 노리려고 보다 위협인 후백제를 고려와 신라로 견제하고 틈을 보아 후백제를 치려 했던 것</strong>.하지만 정작 그 직후 후백제는 공산 전투로 절정을 찍고 그나마 방어선이 되준 나주 일대까지 빼앗기고 고려는 비오는 날 먼지 마냥 털려서 엄두 못냈고 이후 그나마 고창전투떄 고려가 역전했지만 이때는 후삼국이 사실상 정립된상태라 계속 엄두 못내고 끝.<br /><br />3.<strong>후백제와 뭔일이 생겨 돌이킬수 없게 되어 고려랑 손을 잡음.</strong>후백제쪽 기록은 거의다 소실되서 우리가 모르는 기록들이 많음.<br /><br /><strong>번외.자견왕의 국제적 안목이 킹왕짱 뛰어나서 고려를 택함.<br /><br /></strong>이렇습니다.뭐..뭐가 됬든 나주일대 세력이 있는 점에서 탐라는 최소한도의 방어선은 가지고 있었던거기도 하고 감안요소는 있을 것같습니다.<br /><br />자세한건 누가 이쪽으로 더 연구해봐야 겠지만요.</p>

abc3511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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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국제적인 평가가 어떠했건 기본적인 국력에서 후백제가 고려보다 앞섰다는 것은 동의하기 힘드네요.<br /><br />이는 공산 전투 이후와 고창, 운주 전투를 비교하면 더욱 명약관화하다고 봅니다. 후백제는 공산 전투의 승리로 신라를 점령하고 고려와 후백제의 접경 지대의 여러 요충지를 차지할 수 있었지만, 결국 송악에 유의미한 위협은 가할 수 없었죠. 패강 물 드립이야 쳤지만 그건 그거고.<br /><br />반면 고려의 경우엔 고창, 운주 전투에서 승리하자 일리천 전투와 같이 후백제의 도읍에 거의 직공을 할 수 있는 수준이었구요. 물론 이는 견훤이 고려 편에선 점이 크게 작용했지만.<br /><br />기실 후고구려가 후백제보다 훨씬 강력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인 만큼, 후백제는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여러 세력이 이반하자 공세를 취할 입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기서 공산 전투로 일시적으로 우위에 서보기도 했지만 고려의 친신라세력 포섭 및 고창전투의 패배로 다시 열세로 돌아갔다고 보지만요.<br /><br />결국 후백제가 일시의 우세를 보였을 뿐 총체적으로 고려가 우위로 보입니다. 국제적인 시각이 어떠했건.<br /><br />상기한 나주공방전은 후고구려(후신인 고려 역시)가 후백제보다 우위에 있다는 하나의 실례에 불과하구요.<br /><br />물론 글쓴이께서 가정하신 예시들 또한 탐라에서 그리 생각했을 가능성은 있다고 봅니다.</p>

불타는감자밭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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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력에선 후고구려는 나주 공방전 외엔 제대로

 우위를 점했다고 볼게 없습니다.심지어 그 공방전 이후에도 후백제는 끊임없이 커졌고요



그저 서로 잘 안건든거지.고려 왕건 즉위때도 2차 대야성 공성전일 시도한 만큼 후백제의 목표는 신라라서 놔둔거지 후고구려나 고려가 우위라고 볼만한 근거는 없습니다.



덧붙여 이흔암이 맡았던 상주 남쪽은 후백제가 먹었습니다.



학계에서나 관련책에서도 국력은 고려<후백제라고 보고 있는게 많습니다.삼국유사에서도 군사는 우리가 많은데라는 구절에서 둘의 국력차이는 알수 있습니다.



후백제는 공산에서가 아니라 조물성때부터 기세를 타다가를 공산 이후엔 고려 멸망위기입니다.당장에 왕건은 신검에게 죽을 뻔하고 상주 지역은 후백제로 손을 돌려 왕건이나 고려는 최대 위기에 몰렸습니다.



직공루트가 없다?반대죠.서로가 없는데 후백제는 했다하면 승리니 위기감이 아주 큰거였죠.



고창에서 승리로 바꾸긴 했지만 이마저도 견훤은 고창에서 패하고 돌아오면서 고려성을 함락시키고 돌아옵니다.



그래서 종종 기록이 과장됬다는 주장에 쓰입니다만 이건 둘째치고



단순 영토 크기만으로 총체적 우세를 볼수는 없습니다.



굳이 따진다면 고창이후 완벽히 기선을 제압한 것은 운주전투가 더 합당하고 멸망직전입니다.





그러니까 일리천 전투 조차 전력만 볼시엔 고려와 어떻게든 해볼만한 전력은 가지고 있었다는게 주론입니다.(다만 이건 군사력만이고)



후백제가 우세한건 공산전투 일뿐이고 그 전과 고창이후는 시종일관 고려가 우위였다?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나마 포석정 전 사건경우 조물성 전투로 입었던 피해를 복구 준비하고 신라와 협력해 대야성을 먹으며 기선을 잡는 듯 했지만 이마저도 포석정->공산 전투.



이후 다시 대야성 빼앗깁니다.





곡창지대는 후백제에 다 있는데 없을 거라니요.





더욱이 님께서 말한 직공길을 점했다는 것도 우위도 전부 고창,운주에서 호족들의 배신으로 생겨서 생긴 전투일뿐이며 그마저도 일리천이라는

완충지가 있었습니다.



그 어디에도 자견왕이 방물을 바친 시기에 고려가 총체적 우위라고 볼만한 주장은 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자견왕이 보낸건 조물성 전투 이후 공산전투 이전이고 고창,운주 전투가 나오다 한참 이전시기입니다.

이때 총체적 우세라고 확신할만한 근거는 없습니다.



그리고 다시 논점으로 돌아가 말하자면 님의 나주 선전이 가능성은 있지만 저때 시기가 시기니 그걸론 확신하기는 힘들다는 뜻이지



그거일 가능성도 부정한다는게 아닙니다.

abc3511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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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그렇군요. 말씀하신 바는 잘 알겠습니다.</p>

유린청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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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국은 어땠을까요??

불타는감자밭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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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우산국&nbsp;역사 기록 자체가 탐라국 이하로 적은 까닭에 탐라처럼 반 복속되어 있다가 전국시대가 되자 독립했다는 것 말고는 후삼국 시기는 잘모르겠네요.하지만<br /><br />芋陵島(우릉도)에서 白吉과 土豆를 보내 방물을 바쳤다. 백길에게 正位, 토두에게 正朝의 품계를 각각 주었다. (「고려사」 세기 태조 13년 8월) (서기 930년)<br /><br />다만 후삼국 시기에 우산국도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는 것을 보면 우산국도 고려에 손을 들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br /><br />그러나&nbsp;이시기가 이미 우산국에서 <strong>가장 가까운 지리는 전부 고려 땅이고 심지어 고창&nbsp;전투로 판도를 바꾼뒤이며&nbsp;신라는 포석정 사건으로 이미 이름만 있는&nbsp;것을 보면 탐라랑 달리 선택할 곳이 없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br /></strong><br />이때문인지 방물을 바칠때도 우릉'국'이 아닌 울릉'도'라면서 스스로를 낮춰서 서신을 보냈습니다.그리고 고려도 정위랑 정조라는 직위를 줬는데 이 직위도 말갈족들 같이 영향력이 떨어지는 곳에 있는 이들에게 주는 품계였습니다.<br /><br />쉽게 말해 우산국은 견딜만큼 끝까지 견디다가 숟가락도 못챙기고 전부 준 셈이죠.다만 이후 기록들을 보면&nbsp;자치는 허용한 것 같습니다만 이게 탐라랑 비슷하다기 보다는 <strong>말갈족들의 많고 많은&nbsp;부족들중 하나랑&nbsp;비슷한 취급</strong>인듯 합니다.<br /></p>

Tagmata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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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족 해적한테 박살나고 나서 한참 비어있다 구한말때 경상도민들을 이주시킨거라 우산국 사람하고 지금 울릉도 주민하고는 별 상관이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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