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을 끝낸건 천연두라고 합니다
2019.08.20 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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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병자호란때 천연두로 끝났다는 주장을 한 책 제목은 [병자호란,홍타이지의 전쟁] 입니다 저자는 서울대 동양사학과 구범진 교수님 입니다
구범진 교수님은 이 책을 집필할때 참고 자료로 조선 실록뿐만 아니라 명청실록도 분석해서 집필하셨고
-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구성과 규모」, 『한국문화』 72, 2015.
- 「병자호란 시기 청군의 강화도 작전: 목격담과 조석·조류 추산 결과를 중심으로 한 전황의 재구성」, 『한국문화』 80, 2017.
- 「병자호란 시기 강화도 함락 당시 조선군의 배치 상황과 청군의 전력」, 『동양사학연구』 141, 2017.
- 병자호란 관련 논문도 다수 집필하신분입니다 책 내용은 신뢰성이 아주 높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자는 이 같은 이야기를 조선과 청의 각종 사료를 바탕으로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 특히 주목할 만한 부분은 병자호란과 관련해 세상에 퍼져 있는 허위 사실을 바로잡은 대목이다.
대표적인 게 청의 병력 규모다. 학계에서는 그동안 청의 병력이 12만8000명이 넘었을 거라고 넘겨짚었는데 이건 사료적 근거가 없는 가짜 뉴스였다. 청의 동맹군인 외번몽고 병력까지 더해도 청의 병력은 3만4000명 수준이었다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출처] - 국민일보
대표적인 게 청의 병력 규모다. 학계에서는 그동안 청의 병력이 12만8000명이 넘었을 거라고 넘겨짚었는데 이건 사료적 근거가 없는 가짜 뉴스였다. 청의 동맹군인 외번몽고 병력까지 더해도 청의 병력은 3만4000명 수준이었다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출처] - 국민일보
또한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이 50만~60만 명에 달했다는 통설도 터무니없다고 반박한다. 당시 청나라 인구가 130만~240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조선인 포로가 그렇게 잡혀갔으면 최대 인구집단이 됐을 거라는 얘기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청군의 전략이 속전속결이어서 포로 사냥에 열중할 겨를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당시 기록을 살피면 흥미로운 지점을 만나게 된다. 전쟁은 1월 17일 갑자기 협상 국면으로 바뀐다. 우리는 청이 이길 게 확실한 전쟁에서 왜 협상에 나섰던 건지 물어야 한다. 혹시 비축해둔 식량이 없어서였을까. 그건 아니었을 게다. 가을걷이가 끝난 조선인의 곳간을 약탈하는 것만으로도 청은 부족한 식량을 너끈하게 충당할 수 있었을 테니까.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청이 태도를 바꾼 건 천연두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엔 천연두가 유행했다. 조선에 주둔하던 청군 진영에서도 천연두 환자가 발생했다. 홍타이지는 천연두에 극도의 공포심을 갖고 있었다.
한마디로 천연두에 쫓겨 종전을 서둘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토록 중요한 사실은 왜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을까. 가장 큰 이유는 이 같은 사실이 명시된 자료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출처] - 국민일보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청이 태도를 바꾼 건 천연두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엔 천연두가 유행했다. 조선에 주둔하던 청군 진영에서도 천연두 환자가 발생했다. 홍타이지는 천연두에 극도의 공포심을 갖고 있었다.
한마디로 천연두에 쫓겨 종전을 서둘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토록 중요한 사실은 왜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을까. 가장 큰 이유는 이 같은 사실이 명시된 자료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출처] - 국민일보
남한산성에 갇힌 조선과의 종전협상에서 처음엔 느긋했던 청이 정월 17일부터 갑자기 협상을 재촉한 이유는 뭘까. 저자는 당시 조선에 창궐했던 마마(천연두)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몽고족, 만주족은 마마에 특히 취약해 홍타이지가 마마에 걸리지 않기 위해 협상을 재촉했고, 종전 직후 서울에 입성하지도 않은 채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 근거를 전쟁이 끝난 뒤인 그해 7월 5일 ‘청태종실록’에서 찾는다. 홍타이지는 조선을 평정한 뒤 서둘러 귀국한 일을 가리켜 ‘마마를 피해 먼저 귀국(避痘先歸·피두선귀)했다’고 직접 밝혔다. 마마가 전쟁의 향방을 바꾼 셈이다.
[출처] - 한경닷컴
구 교수는 “당시의 위정자들을 무책임하고 무능력하며 부도덕했다고 비난만 해서는 전쟁의 실상에 다가갈 수 없다”고 지적한다. 병자호란 전야의 조선 조정은 나름대로 전쟁에 대비했지만, 결과적으로 조선군보다 더 강하고 빨랐으며 작전도 뛰어났던 청군에게 패했다는 점이다. 구 교수는 “이 책은 전쟁 실상에 좀더 가까이 다가서기 위한 기획의 소산”이라고 했다.
이 책에서 구 교수가 바로잡은 오류나 새로 밝힌 사실 중 몇 가지를 꼽으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이 아니라 ‘1637년 1월’ 일어난 전쟁이다. 청군 선봉대가 압록강을 건넌 날짜를 양력으로 환산하면 ‘1637년 1월 3일’이기 때문이다.
둘째, 조선의 문헌을 그대로 따라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병력이 12만8000명이나 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구 교수는 “당시 청은 그렇게 많은 병력을 동원할 만큼 큰 나라가 아니었다”면서 청의 문헌을 토대로 실제 병력이 약 3만4000명 수준이었음을 밝혔다.
셋째, 당시 조선 조정은 정묘호란 때의 경험을 살려 청군의 침략에 나름 대비했지만, 청군은 정묘호란 때와는 전혀 다른 작전을 구사함으로써 조선의 방비를 무력화시켰다.
넷째, 청군은 조선 수군이 지키던 천혜의 요새 강화도를 단 하루 만에 점령했다. 작전 당일 청군의 작은 배들은 조수 간만의 차를 이용했다. 썰물 때 갑곶 나루의 뱃길을 아무런 저지 없이 건널 수 있었다. 마치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에서 조류변화를 이용해 일본군 수군을 격퇴한 작전을 응용한 것이다.
다섯째, 전황이 압도적으로 유리했음에도 홍타이지는 협상에 나서 전쟁을 서둘러 끝냈다. 청군 진영에 천연두 환자가 발생하자 천연두 면역이 없던 홍타이지와 청의 대다수 황족들은 시간에 쫓겼던 것이다. 조선과 명나라 사람들에게는 천연두가 자주 발생해 면역력을 갖고 있었으나 여진족에게는 면역력이 없었다. 구 교수는 책 제목을 보면 느껴지듯이, 청나라 문헌을 섭렵해 이 책을 집필했다. 조선쪽 문헌으로는 알 수 없는 사실들을 다수 밝혀낸 역작이란 평이다.
첫째,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이 아니라 ‘1637년 1월’ 일어난 전쟁이다. 청군 선봉대가 압록강을 건넌 날짜를 양력으로 환산하면 ‘1637년 1월 3일’이기 때문이다.
둘째, 조선의 문헌을 그대로 따라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병력이 12만8000명이나 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구 교수는 “당시 청은 그렇게 많은 병력을 동원할 만큼 큰 나라가 아니었다”면서 청의 문헌을 토대로 실제 병력이 약 3만4000명 수준이었음을 밝혔다.
셋째, 당시 조선 조정은 정묘호란 때의 경험을 살려 청군의 침략에 나름 대비했지만, 청군은 정묘호란 때와는 전혀 다른 작전을 구사함으로써 조선의 방비를 무력화시켰다.
넷째, 청군은 조선 수군이 지키던 천혜의 요새 강화도를 단 하루 만에 점령했다. 작전 당일 청군의 작은 배들은 조수 간만의 차를 이용했다. 썰물 때 갑곶 나루의 뱃길을 아무런 저지 없이 건널 수 있었다. 마치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에서 조류변화를 이용해 일본군 수군을 격퇴한 작전을 응용한 것이다.
다섯째, 전황이 압도적으로 유리했음에도 홍타이지는 협상에 나서 전쟁을 서둘러 끝냈다. 청군 진영에 천연두 환자가 발생하자 천연두 면역이 없던 홍타이지와 청의 대다수 황족들은 시간에 쫓겼던 것이다. 조선과 명나라 사람들에게는 천연두가 자주 발생해 면역력을 갖고 있었으나 여진족에게는 면역력이 없었다. 구 교수는 책 제목을 보면 느껴지듯이, 청나라 문헌을 섭렵해 이 책을 집필했다. 조선쪽 문헌으로는 알 수 없는 사실들을 다수 밝혀낸 역작이란 평이다.
출처 - 세계일보
그동안 인조가 운이 없는 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보니 생각이 달라지네요 오히려 조선 왕조에서 꽤나 운이 좋은 왕이 아닌가 싶습니다 만약 천연두가 없었으면 대만 정씨왕국처럼 나라가 아예 망할 수도 있고 청나라 병사들이 조선을 더 수탈해서 국력이 더 저하됐을수도 있었을텐데 천연두 덕분에 청군이 빨리 철수함으로서 구사일생 했고 포로수도 50만이 아니라니 패전했으나 괜찮은 결과를 맞은거라고 생각합니다.
저 책을 보면 조선인 포로 인구수 통설 반박 조선은 강화도 방어에 최선을 다했는데도 패배한것이라는 주장과 청나라의 승전 원인 조선의 패배 원인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네요 책을 보고 나니 인조는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한계가 있었고 그 한계를 뛰어넘을 정도의 인물(충무공 이순신 ) 이아니었으며 조선의 허를 찌른 홍타이지가 정말 대단한 인물이란걸 느끼게 되더군요
이 책의 장점은 나무위키 같은 곳처럼 지엽적인 부분 한 곳에 매몰되어 맹목적인 비난을 한 것이 아니라 조선왕조실록,명청실록 같은 사료를 근거로 객관적으로 서술해서 병자호란,인조정권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서술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병자호란에 관심있는분은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 흥미가 있는 분은 도서관에서 빌려보시거나 구입하시는걸 권하고 싶네요
병자호란은 천연두가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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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27
푸우님의 댓글
마엘란님의 댓글
<div>명나라:아. 뒷치기 하려고 했는데!<img src="/cheditor5/icons/em/em3.gif" alt="" border="0" style="width: 50px; height: 50px; margin: 1px 4px; vertical-align: middle" /></div>
<div>청나라:휴. 살았다.<img src="/cheditor5/icons/em/em15.gif" alt="" border="0" style="width: 50px; height: 50px; margin: 1px 4px; vertical-align: middle" /></div>
<div>선조:나였으면 절강성까지 튀었다. 무능한 자식새끼...<img src="/cheditor5/icons/em/em26.gif" alt="" border="0" style="width: 50px; height: 50px; margin: 1px 4px; vertical-align: middle" /></div>
겨울나기님의 댓글의 댓글
나쁜토끼님의 댓글의 댓글
심장미인이리야님의 댓글의 댓글
abc3511님의 댓글
나이트해머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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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애초에 지금 말한 그 책에 그런 이야기 있거든요. 기존에 전쟁 이유로 제기되던 외교적 갈등요소 등등은 병자년 당시엔 대부분 해결국면이었다고. 즉 사실상 조선측이 빌미를 제공했다 그런건 없는, 그야말로 조선에겐 아닌밤에 날벼락같은 전쟁이었다는 것.</div>
<div><br /></div>
<div>책이 제기한 전쟁 발발 원인은 병자년 봄 청의 칭제와 그와 관련된 홍타이치의 판단인데, 이거 진짜 거칠게 말하자면 칭제하는데 필요한 위상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홍타이치가 업적딸 위해 조선 첬다고 읽을 수도 있거든요? 그것도 장기간 준비된 게 아니라 그냥 병자년 봄에 갑자기 결정되서 병자년 겨울에 침공 개시한, 그 전부터 뭔가 분위기를 풍겼네 뭐네 하는 그런거 없는 급작스런 전쟁.</div>
<div><br /></div>
<div>조선, 그리고 인조 입장에선 외교적 문제도 그럭저럭 해결되고 그냥저냥 어떻게든 지내다가 갑자기 저놈이 칭제하고 업적딸 하겠다고 처들어왔다 이꼴입니다. 차라리 그전부터 분위기 풍겼으면 말이나 안하고 준비부족을 탓할 수 있는데 갑자기 1년도 채 안되는 기간에 분위기 만들어지고 펑 터져버린 전쟁이니....</div>
<div><br /></div>
<div><br /></div>
<div>즉? 병자호란이라는 전쟁 자체가 조선측에겐 운빨 더럽게 없는 뭐같은 전쟁입니다. 병자년 전에는 전쟁이 터진다 뭐다 할 걸 짐작할 요소가 전혀 없었던.</div>
아이르테르님의 댓글의 댓글
1636년 6월에 인조가 선전포고 격문을 보내고 1636년 12월 청군이 압록강을 넘었죠
나이트해머님의 댓글의 댓글
<div><br /></div>
<div>당장 선전포고를 했다고 치면 그 이후에 조선이 보낸 춘신사, 화답사가 청에게 받아들여지는 판을 도저히 설명 못하걸랑요. 까놓고 말해 절화교서가 전쟁 명분으로 사용된 건 병자호란 직전이고 이건 그냥 <b>홍타이지가 전쟁 발발 책임을 조선에게 돌리기 위한 빌미에 불과하다는 게 결론</b>입니다. 즉 병자호란을 일으킬 걸 정해놓고 갖다맞춘 거에요.</div>
<div><br /></div>
<div>그럼 전쟁 발발 명분이 뭐냐, 본문의 책에선 언급하는 건 칭제명분입니다. 홍타이지가 칭제한 명분은 '조선을 정복하고 몽고를 통일했으며 옥새를 획득' 했다였고 그걸 이유로 당시 심양에 와 있던 조선측 사신들을 황제 즉위식에 데려와서 삼궤구도구를 강요했습니다. 문제는 이 황제 즉위식 자체가 조선에겐 뜻밖의 일이었고, 거기서 사신들을 데려와 삼궤구도구를 강요한 거 자체가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며, 그와 관련된 외교 사절도 아닌 사람들에게 조선을 대표해 명과의 관계 단절을 선언해라 하는 무리한 요구였던 게 문제입니다. 당연히 이건 정묘화약을 쓰레기통에 처박는 행위고, 그대로 가면 명분이 조선측에 있는게 너무 명백하니 절화교서나 기타 조선 내부 문서들을 가져와서 어떻게든 자신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한 겁니다.</div>
<div><br /></div>
<div>그럼 왜 홍타이지는 조선에게 그런 뜻밖의 요구를 했냐, 그야 명나라가 건재한 상황에서 칭제는 무리한 행위라는 식으로 홍타이지 본인이 그걸 과하게 의식했고, 그래서 거기서 명분 붙이려고 명의 최대 조공국이자 특별한 관계에 있는 조선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b>홍타이지 본인이 생각</b>했거든요. 조선측 입장이요? '칭제하고 싶으면 자기들끼리 하면 그만이다. 거기에 우리가 뭐라 할 필요 없다. 누가 칭제하는 거 금지라도 했냐? 왜 우리에게 물어봐?'였습니다. 따라서 홍타이지 본인이 자기 칭제 명분으로 조선을 끌어들이지 않았으면 애초에 빌미도 안되는 그런 거에 불과했어요. 하지만 홍타이지는 자신이 칭제명분으로 조선을 끌어들여 치장했고, 뜬금없는 끌어대기에 조선측이 거부하니까 그냥 전쟁을 때렸죠. </div>
<div><br /></div>
<div>결국 홍타이지가 원인입니다. 그래서 저 서적의 제목도 '홍타이지의 전쟁' 인 거죠. 이건<b> 인조시기 승정원일기 연구</b>가 진행되면서 더더욱 뚜렷해지고 있고요. 그나마 실록에선 인조와 인조정권이 후금에게 강경하게 나온 것처럼 치장됐지만 승정원일기를 펼치고 연구하면 할수록 강경은 무슨 개뿔의 강경 취급이라. </div>
데이워치님의 댓글
앵거바델님의 댓글의 댓글
조선은 조선대로 휩쓸리고, 청은 청대로 배후지 조선 제압하려고 깊이 들어가다 산해관 진입할 타이밍 놓쳐서 말라죽고...
명은 또 명대로 이자성의 난이 청과 별개로 있는 변수라 멸망은 못 피하죠.
최고 수혜자는 명이 멸망하고서 들어설 가상의 한족 왕조가 되겠군요.
백만불님의 댓글의 댓글
<div>이자성이 한때 홍승주,손전정,노상승 등의 진압군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한 적이 있었을 정도였기 때문에 청이 1637년 공멸했으면 </div>
<div>1641년 송금대첩으로 금주성이 함락 될 일도 없고 명나라의 정예병도 남아 있는 상황이라 </div>
<div> 이자성의 순나라나 장헌충의 서나라는 명나라를 단독으로 멸망시킬 능력은 안되기 때문에 명나라가 살았을지도 모르겠네요 </div>
<div><br /></div>
ReignOfMoE4님의 댓글
..근데 제가 진짜 통 이해를 못하겠는게, 호란 터졌을 때는 임란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아직 군대가 썩어버리기 이른 시점으로 보이고, 아무리 하급 무관들이 죽어나갔다 해도, 살아남은 무관들과 병졸들의 경험이 잊혀지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째서 그리 파죽지세로 밀린걸까요?
무관들을 실질적인 장교층이라 생각하면 아직 그 질이 낮을 것 같지 않고, 그런 것도 저 시대 조선군의 장비질 또한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말이죠...
souloflord님의 댓글의 댓글
<div><br /></div>
<div>광해군 시절부터 구축하기 시작한 북부 방어선이 거의다 붕괴했고
<div><br /></div>
<div>그나마 후방을 차단하고 목을 조를수 있는 남은 북부병력을 이끄는게 이이첨....</div></div>
ReignOfMoE4님의 댓글의 댓글
저 중요한 정병들이 임란 끝나고 얼마 되지도 않이 증발해버리다니;; 거기에 더해 장교진과 전쟁경험 있는 장군들까지 사망했으니, 버티는 것도 힘들었겠네요...ㅠㅜ
나이트해머님의 댓글의 댓글
<div><span style="font-size: 9pt"><br /></span></div>
<div><span style="font-size: 9pt">다만 전술 면에서 아무리 잘싸웠다 해도 전략 면에서 인조가 강화도가 아니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버린 것 자체가 패인이 되버렸지요. 결국 전략에서 머리가 잡혀버렸기 때문에 분전하고도 져버린 꼴이니까요.</span>
<div><br /></div>
<div><br /></div>
<div>덤으로, 3만 4천은 청의 가용병력의 70%에 육박하며 군주 친정은 당시 청에겐 굉장히 위험한 짓 취급입니다.</div></div>
ReignOfMoE4님의 댓글의 댓글
그런데, 강화도 방어에는 왜 실패한걸까요? 임란 끝날때 즈음 조선의 해군은 명 빼곤 아시아에선 적대자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전력을 가졌을 것 같은데요...유지비로 인한 폐선이나, 배의 수명을 30년 정도 잡는다 해도 임란 당시 판옥선 3분지1은 살았을 것 같고, 그정도만 해도 땅개 출신 청의 입장에서 저걸 뚫고 올 만한 해군 준비는 버거울 것 같은데 말이죠.
나이트해머님의 댓글의 댓글
<div><br /></div>
<div>수군이 퍼먹는 맨파워를 생각하면 하삼도에서 수만명씩 지상으로 올라오는 상황에서 수군이 동시에 편성되서 올라오려면 행정소요만으로도 한없이 길어질 겁니다. 경기지역 수군은 지상포대 상대로 충분히 싸웠고, 원래 지상포대야말로 수군이 대응하기 어려운 난적입니다.</div>
ReignOfMoE4님의 댓글의 댓글
wvw135님의 댓글의 댓글
Tachicoma님의 댓글의 댓글
wvw135님의 댓글의 댓글
백만불님의 댓글의 댓글
<div>당시 조선보다 장비 질이 더 좋았던 명나라 군대는 원숭환의 관녕철기 말고는 제대로 승전한 적이 없을 정도로 였습니다 </div>
<div><br /></div>
<div>이자성을 상대로 압도적인 전적을 자랑하는 홍승주의 홍군마저도 송금대전에서 처참하게 패배 한 걸 보면 조선에게 박수를 주고 싶네요 <br />
<div>조선 병자호란 기록을 보면 명나라 보다 훨씬 낫습니다 </div></div>
wvw135님의 댓글의 댓글
가시가시님의 댓글
<div><br /></div>
<div>포로를 50~60만이나 데려갈일은 절대로 없을 상황이군요. 기껏 포로 끌고왔더니 포로로부터 천연두가 퍼지면 그야말로 ㅈ되는거니까요.</div>
괴물임니다님의 댓글
쿠쿠케케코님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