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물_네타] [이벤트] 나를 노예로 삼아주세요
2012.08.04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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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책을 받고 읽은지는 한참 지났는데 미적이고 미적이다가 이제야 감상을 올립니다.
미적인 이유 중 9할은 제 게으름 탓이겠습니다만, 그중 1할은 아마 이 책에 있지 않나 싶어요. 딱히 쓸 말이 없거든요.(...)
<나를 노예로 삼아주세요>는 대박도 쪽박도 아니고 그냥 그럭저럭 읽을 만한 라이트노벨입니다.
요즘엔 라이트노벨을 사더라도 끝까지 읽는 경우가 의외로 적습니다. 읽더라도 대충대충 휙휙 읽는 경우도 있고요. 제목이 뭐였는지 기억도 안 나는 하군인가 조안인가 하는 인물들이 나왔던 소설도 그런 경우였습니다. 물론 그 이유가 꼭 소설이 형편없어서는 아닙니다. 저는 <늑대와 향신료>나 <소드 아트 온라인> 같은 라노벨은 아예 제 1 장도 읽지 못했거든요.(...) 아마 캐릭터나 문장에 대한 취향 때문이지 않나 싶습니다.
<나를 노예로 삼아주세요>는 오랜만에 끝까지 읽은 라노벨이었습니다. 그만큼 제 눈길을 끄는 무언가가 있다는 얘기겠죠.
1.캐릭터
- 캐릭터, 라는 요소는 라노벨뿐만이 아니라 보통 소설에서도 제일 중요한 요소입니다. 캐릭터 한명한명뿐만이 아니라 캐릭터들 사이의 관계까지 고려되어야 하는데요, <나를 노예로 삼아주세요>는 캐릭터 한명한명의 개성은 딱히 두드러지진 않았지만 캐릭터들 사이의 관계망은 잘 짜여진 것 같습니다. 쌍년이랑 미친년이랑 호구놈이랑 게이놈, 이 네 명이 적절하게 플롯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관계도 딱히 억지스럽지 않구요. (게이놈이랑 미친년이 왜 호구놈한테 반했는지는 아마 제 2 권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나리라 생각합니다. 감동적인 에피소드 하나 나오겠죠, 아마)
2.플롯
- 관계망이 잘 짜여졌다, 이것은 플롯이 잘 짜여졌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쌍년이랑 미친년이 서로 대립구도를 이루고 있고, 그 한가운데에서 호구놈이 왔다갔다 합니다. 이 호구놈이 어느 년한테 붙느냐에 따라서 스토리도 결정되겠지요. 안정적인 관계망에서 안정적인 플롯을 추구하려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작가는 쌍년한테 주도권을 줌으로써 플롯을 이끌어나가고 있네요. 결말을 호구놈한테 맡긴다는 점에서 호구놈의 캐릭터도 살려보려고 하신 듯한데, 사실 호구놈이 결말에서 어떻게 행동할지가 상당히 뚜렷하게 예상되었기에 큰 인상은 없었습니다. 클라나드 이후의 라노베가 다 그렇죠 뭐.(...)
3.동기
- 그런데 관계망이랑 플롯이 애당초 마련되어 있다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네요. 즉, 인물들이 서서히 관계를 맺어가면서 차근차근 플롯을 구축해가는 것이라기보다는――그런 요소도 있습니다만――, 소설이 시작할 때부터 이미 관계망이 구축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미친년은 이미 호구놈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게이놈도 마찬가지고요. 아마 미친년이랑 게이놈이 삭막하게 살다가 졸라 착해빠진 주인공 보니깐 "야 이놈이야말로 인간성을 보존한 멸종 위기종이구나"라며 감동하고 반했을 것 같은데, 만약 그렇다면 미친년이랑 게이놈이 호구놈과 엮이는 이유가 캐릭터의 배경 '설정' 때문이라는 얘기가 됩니다. 요컨대 소설 내에서는 호구놈이랑 엮이는 동기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소설의 주요 동기를 소설 안에 배치하지 않고 소설 바깥에 떠맡기는 방법은, 독자에게 불쾌감을 줄 수도 있습니다. "아니 이 미친년은 왜 호구를 좋아하지?"하면서요. 저는 미친년 같은 캐릭터를 좋아하는지라 그냥저냥 넘어갔습니다만 다른 독자 분들도 그러리란 보장은 전혀 없습니다.
이렇게 동기를 바깥에 떠넘긴 이유는 아마 제 2 편을 염두에 둔 탓일 듯합니다. 이렇게 동기를 내버려두면 제 2 권을 시작할 때 막 미친년 아니면 게이놈의 과거 사건부터 떠벌릴 수가 있거든요. 가장 흔한 클리셰는 미친년 아니면 게이놈――제가 생각하기엔 게이놈일 확률이 더 높은데――이 꿈을 꿨는데 그 꿈이 호구놈의 따스한 에피소드와 관련된 거지요. 그리고 깨어나면서 "아 시발 또 그 꿈"하고 깨어남. 그리고 제 2 권 에피소드 시작!
꼭 제 2 권이 아닐지라도 저 동기는 시리즈 어느 부분에서나 등장할 수 있습니다. 제 1 권의 구성을 어색하게 만든 대신에 속편의 구성을 보다 쉽게 했다, 라고 정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
4.테마
- 안타깝게도 감동은 없습니다.(...)
저는 호구놈이 쌍년을 용서하는 장면에서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사실 별로 감동스러운 장면도 아니잖아요. 뭐 네 원수를 사랑하라도 아니고.(...)
제가 생각하기에 이건 플롯이 조금 단조로웠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쌍년이 아무런 반격도 안 하잖아요. 미친년이 바라는 대로 모든 플롯이 진행됩니다. 애당초 미친년이 먼치킨으로 설정되었으니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사실 이 책은 미친년의 미친년을 위한 미친년에 의한 이야기입니다. 미친년한테 졸라 모에하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작가는 미친년을 위해 플롯을 죽였습니다.(...) 저야 이런 캐릭터 좋아하니까 그닥 불쾌하진 않지만요.
그냥 이야기가 굴곡 없이 흐르고 흐르다가 끝. 결말도 딱 그 정도. 호구놈의 역할도 그 정도였습니다.
5.총평
미친년한테 모에하지 않는 사람에겐 억지스럽디 억지스러운 라노벨이 될 것이고, 미친년한테 모에한 사람에겐 억지스럽긴 해도 미친년이 예쁘니까 봐준다 하는 라노벨이 될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수는 있게 해줍니다. 소설이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최소 조건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요즘 이걸 갖추는 라노벨이 드물죠.(...) 그렇기에 '그냥저냥 읽을 수 있는 라노벨'이라고 평가하겠습니다.
6.사족
저는 이 시리즈가 대체 몇 권 이어질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전혀 새로운 요소, 가령 엄청난 악의를 가진 대기업 회장님이 호구놈을 조지려 하거나, 막 악의 조직이 호구놈 하렘을 깨부수려 한다든가, 하는 요소가 등장하지 않고서야 몇 권 이어지기 힘들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2 편에서 작가가 어떻게 자연스러운 이야기를 끌어낼지 궁금하네요.
7.사족2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저는 캐릭터의 깊은 맛은 배경 설정이 아니라 플롯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캐릭터가 얼마나 가혹하고 얼마나 어두운 환경에서 자라났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배경을 가진 인물은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소설이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힘은 플롯에 있습니다.
이 캐릭터가 저 캐릭터의 행동에 맞서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 행동에 캐릭터가 자기 나름대로 동기와 목적을 뚜렷하게 갖고 있는가. 그 동기와 목적이 캐릭터의 성격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가. 그렇게 뚜렷한 행동과 행동의 끝에서 캐릭터는 어떠한 결말을 맞이하는가.――이처럼 캐릭터의 매력은 행동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행동과 행동의 연쇄에서 작가는 전혀 특별한 배경을 지니지 않은 인물도 매력적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안나 카레니나>의 안나를 보세요. 걔가 뭐 특별한 배경을 갖고 있습니까? 남들보다 예민한 감수성, 솔직함, 이게 이 캐릭터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안나와 안나의 남편, 그리고 브론스키, 이렇게 세 명을 갖다붙이니까 안나가 요상하게 되잖아요. 매력적인 여인으로 둔갑합니다. 체호프의 단편인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은 말할 것도 없죠. 엄청 평범한 남녀가 만나더니 엄청 매력적인 캐릭터와 이야기가 되어버립니다. 캐릭터가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은 행동밖에 없습니다. 배경과 말투는 조미료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나를 노예로 삼아주세요>에서 캐릭터들이 뭔 행동을 하나요. 별 행동 없습니다. 여기서 행동이란, 단순한 동작이 아니라 캐릭터들 사이의 상호작용까지 포함합니다. 걍 미친년이 밀고 나가는 대로 다른 애들이 끌려다니잖아요. 플롯이 일직선입니다. 호구놈은 상호작용을 해주는 게 아니라 다만 그 일방통행의 속도를 살짝 늦추고 있을 뿐입니다.
만약 <나를 노예로 삼아주세요>에서 작가님이 목표하신 바가 즉흥적인 재미뿐만이 아니라 어떤 테마라면, 보다 행동과 행동의 흐름에 주목하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배경은 큰 힘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오이디푸스처럼 죽여주는 배경을 지닌 캐릭터도 결국은 그 자신의 행동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 않습니까. 메데이아도 마찬가지고요. 배경은 캐릭터를 거들 뿐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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