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몇년 전에 '케이온' 이라는 애니가 음악, 특히 밴드 음악을 좋아하시는 분들에게 크게 까인 적이 있습니다. 현실성의 결여, 밴드음악에 대한 몰이해, 사실 작품성으로 봐선 훌륭한 일상물이었지만 학교 밴드를 주제로 삼은 작품으로서는 지나치게 말랑말랑했던 탓에 빚어진 결과였지요. 물론 케이온의 음악이 나쁜 건 절대 아니었습니다만, 이를 통해서 섣불리 미지의 영역을 침범하다간 상당한 반발을 불러낼 수 있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나, 나의 아스카 짱은 그렇지 않아!' 의 훌륭한 모범이었달까요.

서브컬쳐에서 의외로 상당한 주류를 이루는 것 역시 밀리터리입니다. 요즘에 쏟아져 나오는 밀리터리 관련 작품들 - 칸코레라던지, 월드 오브 탱크라던지, 아니면 윤민혁 옹의 강철의 누이들이라던지 - 이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을 보아도 확연하게 두드러지는 건 사실입니다. 이런 작품들이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요인은 밀덕과 오덕, 두 부류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었기 때문인데요,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건 장르에 대한 존중과 이해 덕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미소녀들이 전쟁을 벌이거나 전함들이 TS당하는, 이런 비현실적인 상황 속에서도 가장 중요한 본질, '현실성'에 대해서는 확실한 고증이 있었으니.

그런 의미에서 걸즈 앤 판저는 어정쩡한 배경을 가진 작품입니다. 전차도,라는 학생들이 전차를 가지고 모의전을 펼치는 것이 요조숙녀의 귀감, 이라고 평가받는 세상에서 갑작스레 전차도를 시작하게 된 소녀, 니시즈미 미호. 사실 이 '전차도'라는 부문은 무엇으로든지 대체 가능한 부분입니다. 음악, 무용, 마라톤, 결국 이 소설의 주안점은 케이온과 마찬가지로 미소녀들의 학원 생활이니까요. 결국 작품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그 해소, 관계와 그 단절은 어떤 상황에서건 사용 가능한 클리셰에 가까운 물건이고, 전차도가 아니었다면 이 작품 역시 평범한 학원물로 끝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결국 주안점은 작품 안에서 소재로 사용되는 전차도라는 것이 얼마나 완성도가 높느냐, 라는 부분이겠지요. 최근까지 유행한 '사키'라는 작품을 예로 들자면, 전형적인 미소녀로 득실거리는 세계관임에도 이들의 갈등을 다루는 주 소재인 '마작'이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를 확연히 드러내고 매력을 부가하게 활용됨으로서 유행할 수 있었지요. 다행히도 마작보다는 탱크를 좋아하는 서브컬쳐 매니아들이 많기 때문에 작품이 인기를 끄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과연 작가가 세밀하게 전차의 매력과 실제 운용을 작품에서 묘사할 수 있을지가 앞으로의 향방을 좌우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권에서의 전개는 긴박감이 넘쳤지만 너무 빨리 지나간 감이 있어서 조금 아쉽지만, 분명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