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을 읽은 다음, 문득 '잘린머리 사이클' 이 떠올랐습니다. 읽어본 분들은 아시리라 믿습니다만,
니시오 이신의 데뷔작이면서도 그 특유의 개성을 극명하게 나타낸 매력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철저하게
이짱 시점의 1인칭 묘사로 일관하면서도 거짓말을 하며, 온갖 개성을 지닌 등장인물들이 소설을 이끌며
독자들의 기대를 좋은 의미로 부수고 나아가는, 난해하지만 작가의 탁월한 역량이 이 모든 것들을 가능케 한
21세기의 중2병의 총체적 합산과 같은 느낌이니까요.

아마 시기는 조금 다르리라 생각합니다만, 저는 비록 장르적 특성을 뛰어넘어서 위에 언급한 작품처럼
'트렌드' 를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서브 컬쳐의 초창기, 한국에서 저 정도의 박력을 유사하게나마
낼 수 있었던 작품을 꼽자면 '월야환담', 그리고 '오라전대' 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글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독자들의 화학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말하자면 문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작품들이지요.

따라서, 거두절미하고 결론을 말하자면, '쓰고 보니 노예계약' 의 치명적 문제점은 페이지를 얼마 넘기지도 않아서
곧바로 느낄 수 있습니다. 세일즈 포인트, 다시 말해서 경소설의 주 구매층을 노린 타겟 세팅이 낡았다는 점입니다.
소재, 그리고 작가의 필력은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기예' 와 '위법과학' 이라는, 인간이 수십 세기에 걸쳐서 쌓아오른
비상식적인 힘과, 단지 도구를 사용함으로서 기예에 근접하는 능력을 보유하게 되는 과학의 대립. 1억이라는 빚으로
인해 처치곤란한 '기예 사용자' 들을 돌보게 된 어둡고 칙칙하면서도 매력적인 히어로 상의 주인공과, 그리고 그 주변의
개성만점인 히로인들과의 갈등, 그리고 극적인 봉합이라던지. 전부 지금 이 시점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매력적인 설정들입니다.


문제는, 이 글의 분위기입니다. 동 출판사의 작품인 '나와 호랑이님' 같은 경우는, 지극히 가벼운 문체와 지극히 가벼운 분위기들을
이어감으로서 작품의 특성을 분명히 명시하고, 그로 인해서 통상적인 이해를 뛰어넘는 전개 (이를테면 로리콘이라던지)를 독자들의
거부감 없이 끼워넣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러기엔 조금 힘듭니다. 중후...하지는 않지만 결코 가볍지는 않은 문체에,
주인공과 주변인물들의 묵직한 (지나치게 묵직한) 분위기의 대화가 이어지는 와중에, 마치 '약속되었다는 듯이' 벌어지는 '모에' 를 노린 전개들.

마치 약속되었다는 듯이 메이드 복을 입고 나타나고, 매저키스트적 성향을 발산하고, 공돌이 모에 소녀를 가미해서,
주인공의 중2병적인 진화를 유발한 다음, '사실은...' 으로 시작되는 갑작스런 정체의 고백까지. 애니화를 노리고 쓴 작품이라면
어느 정도 납득을 하겠습니다만은, 2015년의 프로페셔널한 떡밥 판별기능을 가진 고성능 오덕들에게 이 작품이 화학반응을
일으키리라는 예상을 했다면은, 저 개인으로서는 그다지 큰 성공은 아니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일러스트는 좋았습니다. 천재 침술사 아가씨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무의미한 드립과 왕도적 전개는 좀 버릴 때가 아닌가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