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물_네타] [룬의 아이들] 루시안 칼츠에 대해서

본문
처음 룬의 아이들을 읽을 때, 그러니까 윈터러를 읽을 때 저는 중학생이었습니다.
다 읽기 전까지 저는 4LEAF 프로젝트에 대해서 전혀 몰랐고, 애초에 연작이라는 개념 자체를 몰랐던 꼬꼬마였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소설에서 세계란 것은 오로지 주인공을 위한 무대 정도였어요. '여러 주인공이 하나의 무대를 공유'하는 개념이나 '연대기'라는 개념은 생각도 못했죠. 제 고정관념상 세계가 주인공에게 부속된 것인데, 어떻게 주인공이 없는 세계라는 개념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리고 사실, 저런 연작은 시도하기도 어렵고 성공하기도 어렵습니다. 개념을 알아도 정작 쓰려고 하면 힘들고, 쓸 수 있게 되어도 그 모두가 독자의 성원을 얻으며 '다음'이 나올 수 있게 되는 것도 힘들죠. 서브컬처계에 여러 본좌들이 있지만 저는 연작을 성공하는 창작자들은 일단 그 자체로 본좌 급의 말석에라도 넣기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런 고정관념이 있는 제게 룬의 아이들의 주인공은 보리스였습니다. 중간중간에 나온 다른 '아이들'은 그냥 매력적인 조연에 불과했죠. 그리고 특히 루시안 칼츠는, 싫었습니다.
보리스는 자신과 정반대인 루시안을 보며 '저런 삶도 있구나' 하고 아무렇지 않게 넘겼지만, 독자로서 과몰입을 하게 된 저는 루시안을 보고 보리스의 역경도 모르는 주제에 존재 자체로 보리스의 삶을 부정하는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게다가 스토리상으로도 민폐를 끼치는 트러블메이커였고.
그러니까 제게 루시안의 첫인상은 최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 지상주의인 제가 보기에 주인공에게 도움도 되지 않고 캐릭터도 상극인 데다 지금 윈터러라는 마검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메인 시나리오 도중에 이딴 사소한 일에 발이 묶이는 것 자체가 용납이 안 되었던 거죠. 그 때는 윈터러가 보리스의 캐릭터 아이덴티티라는 걸 모르고 완결 때까지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던지라.
.......돌이켜보면 이거 사이다패스 웹소설 독자의 전형인데.
데모닉을 읽게 되었을 때, 저는 어느 정도 이 연작에 대한 정보를 접한 상황이었습니다. 테일즈위버도 잠깐 했었고. 그렇더라도 여전히 룬아의 주인공은 보리스라는 생각이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았죠. 이건 마치 한백무림서에서 어떤 기준이 되는 건 무당마검 명경이다, 같은 1편 주인공의 특권 같은 겁니다. 어쩌면 너무 섬세한 조슈아보다는 너무 조숙해진 보리스가 더 제 취향에 맞는 주인공이어서가 아닐까도 싶지만.
그래서 데모닉 최후반에 보리스와 루시안이 등장했을 때, 그리고 보리스가 그야말로 보리에몽이라 불릴 만큼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활약할 때 환영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루시안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죠. 물론 존재감이 없을 수가 없는 캐릭터인지라 제 주의를 끌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그래도 악감정은 많이 사라졌지만 '쟤는 저런 애지....' 정도에서 그칠 뿐, 그러니까 '내가 너 어떤 놈인지 아니까 참아준다'에 가까운 인상이었습니다.
시트콤에 흔히 있는 사고뭉치 조연 정도로 여기게 된 거죠.
그리고 블러디드. 10년 가량의 텀을 두고 나온 신작.
저는 그동안 아마추어 작가 지망생이 되었고, 여러 패러디를 썼고, 점차 소설 감상도 독자보다는 작가의 입장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작가보다는 편집자일지 비평가일지....어쨌든 순수한 독자와는 좀 멀어졌죠.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루시안이라는 캐릭터는, 강력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걸요.
보통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주인공의 앞에 생긴 난관을 해결해주는 조력의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작품 전체로 보면 전개를 위한 작가의 인위적인 개입 자체를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부를 수 있습니다.
이건 작가를 TRPG에서의 GM으로 빗대면 더 확실해집니다. 주인공의 앞을 막는 적들, 최종보스, 세계의 구조 같은 것들은 모두 작가가 움직인 것이니까요.
그리고 루시안 칼츠는, 막시민 리프크네가 거의 크툴루 신화의 옛 신처럼 여길 정도로, 혼란을 만들고 사건의 전개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튀게 만드는 강한 추진력과 에너지를 갖춘 캐릭터입니다.
보통 주인공이 될 정도라면 강한 목적의식과 추진력을 갖기 마련이죠. 이스핀처럼요. 마치 대항해시대의 모험가 같습니다. 그러나 별다른 목적의식 없이 폭풍처럼 주변인을 휘말리게 해서 항로를 완전히 이탈하게 만드는 천재지변은 그런 모험가의 천적입니다. '폭풍우 덕에 한 달 걸릴 항로가 절반으로 줄어들었어!'도 가능하지만 '폭풍우 때문에 무인도에 좌초했어!'도 가능하단 거죠.
이건 말이죠, 작가 입장에선 엄청 좋습니다.
평범한 트램 같은 사건 전개를 완전히 롤러코스터 같은 급전개로 뒤바꿔버리는 장치. 더 좋게도 될 수 있지만 더 난감하게도 될 수 있는 복불복.
예능 프로그램에서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느낌이죠.
애초에 그런 게 캐릭터성이라면 작가가 인위적으로 뭘 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얘를 폭주시키고 주변을 휘말리게 하면 포복절도할 예능이 만들어집니다.
물론 사이다패스 입장에서는 완전 최악이죠. 루시안 칼츠가 그런 면에서는 대단한 게, 캐릭터 조형을 잘 해놨기 때문에 강하게 미움받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이런 균형을 갖추지 않았다면 독자들이 '발암캐'라고 부르며 갈아죽이길 원하고 소설 인기에 악영향을 끼치는 요인이 될 테지만, 루시안은 제가 제일 싫어했던 윈터러에서도 보리스의 성장한 면모를 돋보이게 해주며 또 그간 시련을 겪었던 보리스를 힐링하게 해주는 긍정적인 캐릭터였습니다.
제가 감히 전민희만큼의 시야와 실력을 갖추지는 못했으므로 단언할 수는 없지만, 아마 루시안은 후속작에서도 주인공이 되지는 않겠다 싶습니다.
그 대신, 강한 존재감을 가지는 조연으로서 훌륭한 매력을 선보이며 작품의 전개를 풍성하게 만들고, 그러면서도 고운정 미운정 다 들어서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캐릭터가 될 겁니다.
소설이든 만화든 게임이든, 조연으로 이런 캐릭터 하나만 잘 만들어도 전개에 무리수를 둘 필요가 없어진다는 점에서 작품에 기여도가 높은 캐릭터.
웹소설 작가 혹은 지망생이라면 보이는 비중보다도 더 심화된 연구를 할 가치가 있는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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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23
알카시르님의 댓글
그런데 루시안이 보리스만큼 강하긴 할까요? 테일즈 위버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에서 지금까지 룬의 아이들에서 자세하게 다룬 애들 중에 싸움을 대단히 잘한다고 여겨지는 건 보리스밖에 없는 것 같은데(사실 윈터러와 데모닉밖에 못 봤지만요) 루시안은 윈터러에서 본 모습만으론 그렇게 강하다고 여겨지진 않네요.
테일즈 위버는 이제 룬의 아이들과는 아무런 상관 없다고 봐도 될까요? 스토리가 전혀 달라진 게 아닐까 싶군요.
아스펠님의 댓글의 댓글
........다만 루시안은 아직 스포트라이트를 차지한 적이 없다보니 대강 테일즈위버와 룬의 아이들 설정이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혹은 달라진 점이 나오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루시안은 '아이들' 중 최약체.....
알카시르님의 댓글의 댓글
3부 블러디드에서 루시안을 달리 보게 되셨다길래 3부에선 루시안이 주요 캐릭터로 나오는 줄 알았는데 여전히 조연인가 보군요.
룬의 아이들 중에 보리스 말고는 소설에서 딱히 강하게 묘사된 캐릭터가 없는 것 같은데(3부는 안 봤고 1부와 2부도 옛날에 봐서 생각이 잘 안 나긴 하지만요), 루시안이 그 중에서도 가장 약했나요... 근데 루시안이 최약체란 말이 있던가요? 작가가 그렇게 말했던가...
아스펠님의 댓글의 댓글
블러디드(무료분)에서는 아직 조연입니다. 끝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요.
룬의 아이들과 4leaf 프로젝트는 다소 복잡한 관계입니다. 윈터러 후기를 참조하면 전민희가 이전부터 생각하던 몇몇 캐릭터 설정과 게임사에서 프로젝트에 섭외하러 오면서 미리 준비해뒀던 캐릭터 설정이 따로 있었고 이게 합쳐졌거나 등등......일단 테일즈위버에 대해서도 캐릭터와 세계관 설정만 공유하는 느낌이고 스토리에는 별로 참여하지 않는 듯합니다.
보통의 OSMU와는 달리 One Source를 합작해서 만들었다고 해야 하나....
이부키스이카님의 댓글의 댓글
뭐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없는 이야기지만... 몇년 됐다고...
kairoun님의 댓글의 댓글
게임을 소설으로(O)
본래 룬의 아이들은 4Leaf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포리프 세계관을 알리기 위한 캐릭터별 서사 소설화 프로젝트입니다.
테일즈 위버는 4리프에서 갈라져나온 게임중 하나이고요. 기본적으로 같은 캐릭터와 배경을 다루되 별개의 역사를 가진 프로젝트입니다.
평행세계선에 가깝죠.
여우신랑님의 댓글의 댓글
룬의 아이들 셰계관도 매력적이지만 테일즈위버 셰계관도 매력적이었는데...
에피소드2로 탄생석, 각성자, 테시스 등 각종 매력적인 설정들은 사라지고
현재의 테일즈위버는 오리지널도 아니고 룬의 아이들도 아닌 이상한 짬뽕이 되어버려서 아쉽습니다...
쟌리님의 댓글
독자 입장이랑 작가 입장에서 보는 것이 이렇게 차이가 날 수가 있군요.
아스펠님의 댓글의 댓글
쟌리님의 댓글의 댓글
그런데 너무 대단하다보니 독자들이 따라 갈 수 없을 때도...(특히, 시리즈 물이 될 때에 주인공 교체가 일어나면 전작 주인공이 너무 좋아서 바뀐 주인공 적응하기가...)
아스펠님의 댓글의 댓글
Carampa님의 댓글
HAMELN님의 댓글
아스펠님의 댓글의 댓글
HAMELN님의 댓글의 댓글
그런데 남은 아이들은 뭔가요?
아스펠님의 댓글의 댓글
kairoun님의 댓글의 댓글
주연과 조연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4리프의 모든 캐릭터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때까지 룬의아이들은 계속될 예정입니다..계획은 그렇게 되어 있어요.
하인즈워드님의 댓글
Izaro21님의 댓글
작가님 입장에서는 캐릭터를 적재적소로 잘 활용하신것이였군요.
흥미로운 내용 감사해요.
노히트런님의 댓글
특히 첫등장이 윈터러인 이상.
뭔가 해볼려면 일단 이녀석을 보리스로부터 떨어뜨려야함.
아니면 필멸의 땅 모험팟의 대장정도?
그와는 별개로 지금 보리스를 잡고있는 닻 같은게 루시안이라고 생각중.
이녀석 애 아니면 그냥 초야에 뭍혀서 대장간이나 농사짓고살 애라(...)
아스펠님의 댓글의 댓글
숯참님의 댓글
새누님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