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물_네타] [제로의 사역마] 왜 이렇게 밈이 많아졌는가?(스압)

본문
이전에 자유게에 올렸던 '삼총사와 제로의 사역마'의 후속글입니다.
오랜만의 제로마 AA의 댓글 중에 팬픽의 묘사를 원작의 묘사로 오인하신 분들이 여럿 보였기에 쓰기 시작한 건데, 분석을 위해 원작, 오래전의 팬픽, 장작위키 제로마 문서의 이전 버전 등을 관찰하다보니 완성이 늦어졌군요.
왜 이렇게 밈이 많다 못해 원작의 묘사 대신 원작 설정 행세를 하고 있는가에 대한 고찰글입니다.
설정게에 옛날에 올렸던 ‘제로마-오인받은 설정’, 최근에 올린 ‘제로마-설정 풀이와 연동되는 글이고, 내용상 다른 분석글과 중복되는 내용이 좀 섞였습니다.
설정 풀이는 그냥 원작의 서술을 그대로 옮겨 쓴 거지만, 이 글은 제 추측과 개인적인 감상도 많이 들어가서 따로 분리해서 감상게에 올려요.
근래 들어 만화든 게임이든 팬들이 자학개그나 왜곡 밈으로 놀다보면 안 본 사람들 중에도 진짜인 줄 알고 까는 사례가 종종 보이더군요.
제로마는 오래 된 작품이고, 원 작가님의 사망으로 후속작도 불가능하죠. 원작 사양의 리메이크 애니가 나오면 모를까, 관심도가 다시 오를 기회도, 유명 팬픽에서 각색한 설정은 왜곡 밈 비슷한 거라고 정정될 가망도 없어 보입니다.
국내만 그런 게 아니라, 일본에서의 밈이 국내로 온 겁니다. 일본의 제로마 팬픽 중에서 후술할 유명 팬픽 외에도 밈을 원작 설정으로 오해한 채 인용한 작품을 여럿 봤습니다.
<장르에 의한 오해>
제로마는 엄밀히 분류하면 현재 유행하는 일본식 이세계물이 아닙니다. 해당 장르가 제로마 팬픽에서 파생했다는 일본 현지의 분석이 있을 정도로 원형이 된 건 맞는데, 정확히는 이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러브코미디’물입니다.
러브코미디의 시초인 루미코 작가님의 ‘시끌별 녀석들’에서 외계인의 등장에 의한 지구의 정치적 변화에 대해 설명을 하던가요?
같은 작가님의 모험 활극인 ‘이누야사’에서 요괴의 준동으로 엉망이 된 일본의 정세에 대해 설명을 하던가요?
제로마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사이토와 하렘 멤버 간 사랑의 시련을 위한 무대장치고, 그 이상은 사족이라 정치, 사회, 경제, 군사 등의 묘사가 엄청 자세하진 않습니다. 추측으로 메워야 할 부분이 많을 수밖에요.
이런 점은 팬픽을 쓰기엔 좋은 환경이지만, 그럴듯한 추측이 많이 나올수록 원작 설정으로 착각하는 독자가 늘어나는 원인이기도 하죠.
국가 관련 묘사의 비중만 봐도, 갈리아는 타바사 외전 덕에 좀 나왔지만 알비온과 게르는 전부 합쳐도 1권을 못 채웁니다.
일부 팬픽처럼 주인공이 기지를 발휘해 약소국의 군대로 강대국의 군대를 몰아내는 게 아니므로, 국력에 대한 묘사도 길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쟁씬에서 사이토의 역할은 히로인들을 위해 목숨을 거는 걸로 끝이니까, 위기를 만들려면 그냥 해당 히로인이 위치한 전장이 위험하다는 묘사로도 충분하죠.
7권의 7만 대군도 요즘의 이세계물이라면 무쌍을 찍거나 포위섬멸전(웃음)처럼 대단함을 부각하는 장치지만, 제로마에선 그저 사랑의 장애물입니다.
서로 오해하고 싸우면서도 둘의 사랑은 진실했기에 사이토는 목숨을 내다버리고, 루이즈는 절망감에 자살을 시도하는 등 둘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보여주는 장치로 쓰인 거죠.
그래서인지 이 씬과 22권의 마지막 돌격씬만 현대 무기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냥 이기면 “걱정했잖아, 바보!”라던가 “믿고 있었다고, 젠장!”으로 끝나는 이야기니까요.
이런 묘사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장르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으면 작품의 해석도 이상하게 바뀝니다.
예시로, 앙리에타의 불륜은 고증 상으론 모티브인 실제 역사의 앙리에타와 소설 ‘삼총사 3부(철가면)’의 앙리에타가 루이 14세와 불륜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연애물적으론 주인공 커플을 분열시키는 갈등 장치입니다.
작품 내적으론 갑작스레 떠맡은 책무로 인한 스트레스(+알콜 중독)와 연인을 잃은 탓에 생긴 도피 감정 때문입니다. 사정은 딱하지만 이기적인 게 맞습니다.
여기에 정치극을 끼얹으니, 허약한 왕권을 위해서 사이토를 끌어들이는 게 유리하다는 엉뚱한 분석도 나왔습니다.
2권부터 14권까지는 앙리에타가 강한 권한으로 사고를 치면 루이즈 일행이 수습하는 이야기인데도 왕권이 약하다고 착각한 건 둘째 치고, 힘들어서 애처럼 군 게(17살이니까 애가 맞긴 함) 냉철한 정략으로 둔갑했어요.
앙리에타와 맺어지면 루이즈와 관계가 약해지고, 간달브의 힘도 없어지므로(데르플링거가 직접 말해 줬음), 사이토도 그저 그런 총사대원 중 한 명이 될 뿐입니다.
설정 상 불가능하거니와, 원작이든 애니든 치정극이지 정치극이 아니죠.
제로마를 전형적인 이세계물로 커스텀한 팬픽만 보고 러브코미디로서의 원작을 본 적이 없는 분들을 위해 첨언하자면, 원작은 액션씬 등은 짧게 넘기고 루이즈-사이토 커플 간 사이가 깨졌다가 다시 결합하는 묘사만 2권부터 17권까지 여러 번 되풀이됩니다.
1권에선 아직 서먹할 때고, 18권부턴 루이즈가 사이토의 바람기를 반쯤 체념하거든요.
루미코 작가님이 정립하신, 커플이 확정될 것 같다가도 썸 타는 관계로 되돌아가는 전개가 반복되는 러브코미디 장르의 문법에 아주 충실하죠.
키스까지 했는데 커플이 아니라는 것도 웃기지만, 초반엔 루이즈가 왈드나 줄리오에게 설레는 모습을 보여줘서 사이토가 질투하는 반면, 뒤로 갈수록 관계가 역전돼서 루이즈가 매달리고 사이토가 루이즈에게 사랑한다는 확신을 못 주거든요.
그럼에도 루이즈의 위치는 확고한 것이, 다른 히로인들은 열심히 유혹-사이토가 헤벌레하면서도 받아주진 않음-그래도 계속 어필함-루이즈의 질투 등으로 소강상태가 됨의 전개가 반복됩니다.
키스도 루이즈는 자주 하지만 다른 애들은 많이 못 했죠.
앙리에타는 손등에 하라는 걸 못 알아듣고 들이댈 때 1번(2권), 리슈몽을 유인하려고 사이토와 암행했을 때 경비병의 눈을 속이려고 2번(5권), 오르니에르의 저택 지하실에서 3번째로 할 뻔 했다가 루이즈가 목격하면서 중지(17권)됐습니다.
티파니아는 리브스라시르 계약 때 1번(20권), 시에스타는 루이즈의 체념 후에 기회를 얻어 저택에서 1번(18권), 타바사는 셰필드가 요르문간드의 프로토타입을 데리고 습격했을 때 루이즈 앞에서(질투심 유발로 허무를 쓰기 위한 정신력 보충) 1번 했습니다(11권).
간달브의 효과 덕은 아닙니다.
8권에서 사이토는 한 번 죽은 뒤 간달브가 해제되니까 곁에 있을 자격이 없다며 돌아가길 주저하고, 루이즈는 그딴 거 아무래도 좋으니까 죽어서라도 보려고 자살 시도까지 합니다.
시에스타의 설득으로 알비온에 간 루이즈가 셰필드의 습격으로 위기에 처하자, 마지막 발악으로 쓴 서몬 게이트를 통해 재회한 ‘일반인’ 사이토가 루이즈가 영창 할 시간을 버는 등 룬 없이도 서로를 사랑한다는 묘사가 확실히 있습니다.
대필 작가님이 쓰신 파트에서도 루이즈만 현대로 돌아가는 사이토를 따라가고 다른 히로인들은 그냥 버려졌습니다. 다만 원 작가님은 하렘 엔딩도 염두에 두셨던 것 같습니다.
할케기니아는 유럽과 달리 동양처럼 측실 제도가 있다는 묘사가 있거든요.
타피니아는 사정상 숨겼지만 첩의 딸이었고, 열풍 외전에선 기쉬의 아버지가 남장한 카린느에게 “네가 여자였으면 즉시 후궁이 되는 것도 가능하겠다.”라고 했지요. 동료가 된지 얼마 안 된 사람에게 불륜하기 좋게 생겼다고 하는 건 이상하니까, 정부는 아닐 겁니다.
이거라면 발리에르 공작가가 사생아의 후손인데도 명문가로 성장한 이유도 설명됩니다. 측실 제도가 없으면 정부와의 불륜+혼외자의 자식이라 인지를 거부하면 고아가 되지만, 있으면 두 번째라도 엄연히 부인인 사람의 자식이니까요.
얘기를 되돌려서, 장르에 대한 호불호 때문에 원작이 팬픽보다 저평가당한 탓도 있습니다.
라이트 노벨+하렘물+섹스어필+막장 치정극이 섞였으니 호불호가 갈리는 것까지는 당연한 일입니다만... 정도가 지나쳐서 장르에 대한 호불호와 작품의 수준에 대한 평가를 동일시하는 글이 있더군요.
원작은 생각 없이 썼다는 저평가를 받을 수준은 아닙니다.
같은 연애물이라도 왜 반했는지에 대한 치밀한 서사가 있는 작품과, 무지성으로 반하는 작품을 같은 선상에 둘 순 없죠.
설령 후자라도 다른 매력 포인트가 있을 수 있으니, 함부로 내려치기 할 순 없고요.
원작이 유명 팬픽에 비해 정치나 경제 등을 포함한 어려운 얘기가 적지만, 가볍게 읽기 위한 ‘라이트’노벨인 이상 단점이 아닙니다.
예전에 위키의 제로마 문서 내 비판 항목에 세계관은 탄탄하게 만들어놓고 겨우 연애놀음이나 한다는 게 있었죠. 원작초월 문서에도 서비스씬을 줄이고 전개를 진지하게 바꾸면 초월 팬픽이 나온다는 말이 있고요.
판타지 쪽 설정이 아깝다는 푸념이나, 서비스씬이 너무 많아 몰입감이 떨어진다거나, 하다못해 페스나처럼 에로씬이 별로 안 꼴린다 같은 비판이면 몰라도, ‘러브’코미디물에서 연애하는 걸 진지하게 비판 대상으로 삼은 건 지금 생각해도 황당한 일입니다.
내용이 진지하지 않다는 비판도, 연애물은 진지한 장르가 아니라는 편견이 드러나는 말입니다. 열등감 때문에 다가가지 못하는 루이즈나, 도피 감정으로 사이토에게 매달리는 앙리에타의 묘사가 진지한 게 아니면 뭐가 진지한 묘사겠습니까?
소재가 막장 치정극인 것과 작품 전개가 엉망진창인 건 결이 다른 얘기입니다. 이건 자기가 선호하는 장르 아니라고 작품까지 내려치기한 거죠.
서비스씬이 많은 것도 러브코미디물의 효시인 ‘시끌별’의 라무부터가 비키니만 입은 섹스어필 캐릭터인데 이제 와서라는 느낌이고요.
위의 논리대로라면 유명 팬픽들도 내려치기 당합니다. 현대인천재론 장르를 싫어하는 사람이 보기엔 세계관의 수준과 인물의 지능을 하향시킨 게 불쾌하겠지요.
‘라이트’노벨인 제로마에 복잡한 국가 운영이나 현학적인 이야기를 집어넣은 게 안 어울린다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요.
어떤 장르든, 장르로서 성립한 이상 독자층을 형성할 최소한의 매력은 있다는 뜻입니다. 개별 작품으로선 종종 역겨운 작품이 있을지라도, 자기 취향 아닌 장르라고 무시하다보면 장르소설을 책 취급도 안 하는 꼰대들처럼 되는 겁니다.
다만, 서비스씬의 비중이나 묘사의 깊이 등에 관련해서 애니판만 본 사람은 충분히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2기의 절정 파트인 7만과 싸운 후의 후일담도 애니판에선 부실하게 바뀌었습니다.
사이토는 한 번 죽은 뒤 금방 복귀하고, 루이즈는 걱정시켰다며 죽었다가 살아난 사이토를 폭행하고, 그 후에 바로 간달브 다시 계약하고 거기서 2기 끝입니다.
3기부턴 상태가 더 안 좋아져서 심리 묘사는 거의 다 잘렸고, 아예 에로씬만 보여주고 스토리 진행을 안 하다가 막판에 급하게 마무리를 지었어요.
앙리에타가 왜 사이토에게 빠질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서사는 줄이고, 유혹신의 비중은 늘리고, 루이즈에게 변명하는 장면에선 뜬금없이 2명의 목욕씬을 넣었습니다.
이건 개그씬, 에로씬도 아니고 루이즈가 “색기만큼 정치를 했다면 태평성대를 이룩했을 것”이라는 명대사(?)로 비꼬는 진지한 장면(17권)입니다.
루이즈에게 해명(?)할 때도 애니에선 ‘좋아하게 돼버렸으니 어쩔 수 없잖아요’라고 말하지만, 원작에선 유혹은 기가 막히게 잘 하는데 정작 연심을 강조하는 묘사보다는 ‘내가 연애를 해도 괜찮을까’, ‘연인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루이즈가 부럽다’ 등 고뇌의 비중이 크죠.
루이즈 입장에선 “그걸 고뇌라고 하고 있냐?”는 말이 절로 나오는 행패지만요.
18권에 목욕씬이 있긴 한데, 이건 루이즈가 앙리에타에 비하면 빈약한 몸매인 걸 알면서도 사이토의 마음을 다시 가져오려고 애써 유혹하는 장면입니다.
몸매는 정반대지만 페스나 헤필 루트의 사쿠라가 시로에게 한 일과 같은 거지요.
반대로 사이토는 바람이나 핀 자신이 루이즈의 몸을 만져도 되겠냐며 죄책감을 드러내는 씬이고요. 앙리에타는 여기에 끼지도 못 했어요.
<유명 팬픽들의 각색+그걸 그대로 원작 문서에 집어넣은 위키>
원작 설정으로 착각당한 팬픽은 ‘할케기니아 남선북룡(오리지널 주인공)’, ‘제로인 제독(양 웬리 소환)’, ‘케티도 생각해주세요(엑스트라 캐릭터로 환생)’의 3개입니다. 위키의 제로마 팬픽 문서 하단에 따로 소개될 정도의 유명작품이죠.
나머지 3개 중 ‘할케기니아 온라인’은 배경만 제로마지 ‘소드아트 온라인’ 팬픽에 더 가까우니 빼고, ‘제로의 사역마의 루프물을 AA로 해본다(회귀물)’와 ‘할케기니아 씰브레이커(주인공 밀레시안 소환)’는 ‘남선’과 ‘제독’을 베이스로 둔 3차 창작에 가깝지요.
괜히 유명해 진 게 아니라서 다들 잘 쓴 글이고, 원 작가님의 사망 후에도 제로마 IP의 수명을 늘린 공이 있습니다.
팬픽의 제목을 직접 거론한 건 따로 떼고 이야기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팬픽의 설정이 원작 설정에 들러붙은 상태이기도 하고, 각 팬픽 작가님들이 고심해서 썼을 각색이 어물쩍 원작 설정으로 둔갑당해 본인이 쓴 걸로 취급 못 받는 건 좀 아니다 싶어서입니다.
설정을 착각한 분들 입장에서도 이정도 되는 작품이니까 오인했다고 납득하려면 언급을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았고요.
너무 유행한 탓에 한때는 위키의 제로마 설정 문서 내 3분의 1정도 되는 분량이 원작 설정으로 둔갑한 팬픽의 설정이었고, 이게 원작 및 애니판의 설정과 뒤죽박죽 섞여있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지만요.
소설과 애니를 전부 보기엔 부담스러운 분들은 위키를 이용하기 마련인데, 하필 장작 위키의 전신 때부터 제로마 문서는 이런 오류가 오랫동안 방치됐습니다.
애니나 팬픽만 보고 원작을 본 사람은 그보다 훨씬 적기도 하고, 원작을 본 사람도 오래된 작품이라 기억이 흐릿해진 분들이 많을 테고요.
대부분의 제로마 팬픽은 사이토 대신 소환된 주인공이 원작 스토리를 따라가되 변주를 주거나 크로스오버한 세계관을 약간 엮는 정도라 할케기니아의 수준은 잘 안 건드립니다.
반면에 예시로 든 팬픽들은 할케기니아 및 트리에게 불리한 부분만 모아 과장한 별도의 세계관을 새로 구축한 다음에 개입했지요. 점점 전형적인 발판형 이세계로 덧씌워 진 겁니다.
원작은 기사 대신 메이지가 있다는 것만 빼면 중~근세 유럽과 큰 차이가 없어요(로마리아 제외). 당연한 게, 해당 클리셰가 유행하기 전에 나온 작품이라 ‘전형적인 이세계’의 이미지가 약했을 때니까요.
이건 필력과는 별개입니다. 잘 썼으니 여태껏 회자되고 원작 설정으로 착각도 당하는 거지, 아니면 원작 내려치기가 심하다는 비판만 받고 끝났겠죠.
특히 ‘제독’은 반쯤 헤이트물에 가까운데다 제로마 인물만 바보로 만든 것 때문에 작가가 키배까지 떴지요. 그런데 키배가 차라리 나은 게, 국내에 들어올 땐 이게 각색이라고 반박해주는 사람도 적어서 착각하는 사람들이 늘었습니다.
그럼 어떤 방식으로 단점을 과장했는가를 보면, 전지적 작가시점의 해설이나 실전파의 발언은 빼고, 비실전파(퀴르케, 기쉬 등)와 온실 속 화초(앙리에타, 엘레오노르 등)의 발언만 골라 세계관을 통찰한 대사로 취급했습니다.
예시로, ‘케티’는 아카데미의 명령으로 현장에서 뛴 멘누빌의 인체실험 증언(6권)은 버리고, 아카데미에 소속된 지 얼마 안 된 엘레오노르가 겪은 신학탐구만 인용해서 할케기니아는 6000년 간 실용마법의 발전이 없는 곳이라는 각색을 했지요.
이 각색은 엘레오노르 문서에서 한동안 원작 설정 행세를 했습니다.
원작에선 중요조연인 콜베르부터가 인체실험까지 하던 아카데미 소속이었고(6권), 마력증폭 포션(16권)이나 상시연금방출장치(17권. ‘씰브’의 오리지널 설정으로 오인하신 분들이 있던데 원작 설정)라는 실용품도 나왔으며, 아카데미 의장이 엘레오노르에게 “이제 학생도 아니니(=이때까진 풋내기였으니) 본격적인 연구를 할 때가 아니겠냐?”라는 말(17권)도 했지요.
팬픽 내에서만 쓰면 각색이지만, 이걸 원작 설정이라고 주장하면 왜곡이 되죠.
팬픽 작가님들께 그럴 의도는 당연히 없으셨겠지만, 결과적으론 독자 분들께 뭐가 진짜 설정인지 상당한 혼란을 줘버렸습니다. 도의상의 책임(?)은 있는 셈이죠.
이건 원작의 설명이 세세하지 않은 것과도 별개의 문제입니다. 원작에서 제대로 설명한 부분도 팬픽계에서 유행하는 밈에 묻혔으니까요.
제가 힙스터 기질이 있어서 똑같은 설명을 두고 유명 팬픽과는 다르게 일부러 삐딱하게 해석한 거 아닙니다. 제로마는 라이트노벨이라 단순하고 직관적인 설명이 많아 해석이 갈릴 여지도 적은 편이예요.
예시로, 마리안느는 앙리에타에게 군사강국인 게르에 있는 게 더 나을 거라는 말을(3권), 퀴르케는 트리가 약해진 탓에 동맹에 매달리는 처지라고 비웃습니다(3권).
하지만 전지적 작가시점의 해설로는 게르도 알비온 군을 상대할 힘이 부족해서 동맹이 절실한 상황이라며 직접 부정합니다(3권, 4권).
보통은 작중 인물의 대사를 해설보다 우선하지 않겠지만, 유명 팬픽들과 위키에서 전자만 인용하면서 후자는 독자들에게 잊혀 졌습니다.
또한, 치세 동안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필립 3세가 게르를 회전에서 이겼다고 해설로 직접 설명하는데(열풍 외전), 이걸 보고 일부 팬픽의 묘사처럼 게르의 군사력은 오래 전부터 트리를 추월했었다는 말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본편 시점의 게르가 트리보다 강하다고 오인하는 건 몇몇 인물의 대사 때문에 헷갈릴 여지가 있지만, 오래 전부터 그랬다는 건 해석의 차이나 각색도 아닌 아예 오리지널 설정입니다.
‘죽고, 죽이는 관계’라거나 ‘막강한’ 게르도 필립 3세에겐 졌다고 한걸 보면 쉽게 압승한 건 아닙니다. 쉽게 이길 정도라면 트리가 영토도 뜯었겠지요. 마리안느가 말한 군사 강국 게르(3권)도 이때 호각으로 맞붙은 걸 보고 말한 것 같네요.
졌는데 이겼다고 정신 승리한 거라고 해석한 작품(‘루프’)도 있기는 합니다. 이러면 강대국 게르라는 각색과 모순되진 않지만, 트리가 난세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더 꼬입니다. 원작의 텍스트 그대로 해석하면 간단한 걸 굳이 뇌피셜을 좀 돌려야 하는 시점에서 이미 원작 설정과는 멀어진 거죠.
약소국이 마지막 힘을 쥐어짜 몰아 낸 게 아닙니다. 오히려 필립 3세가 전쟁광이라 사소한 이유로 여기저기 선공하는 일이 잦았다는 언급이 있습니다.
전쟁을 멈춘 후로는 에스타슈가 재정을 금세 전쟁 이전으로 복구했다고 하니 군사력 외의 분야가 부실한 것도 아닙니다. 모조리 이겼다니 배상금 덕도 있었겠습니다만.
나중에 슬쩍 추가한 설정도 아닙니다. 오스만은 1권에서 간달브를 숨기는 이유를 말할 때 중앙이 전쟁광이라 깐 적이 있지요(1권. 그러는 자신도 9권에선 오스트란트호를 보자마자 군함 생각부터 했음). 죽고, 죽이는 관계라는 대사도 루이즈가(신뢰도 낮은 학생의 발언이지만 해설과 일치하니 인용) 1권에서 한 말입니다.
필립 3세가 죽은 지 수 십 년이 흐른 것도 아닙니다. 2권에선 앙리에타가 필립 3세 시절엔 귀족들이 철저히 복종했다는 대사를(=통치가 어땠는지 기억하고 있음. 마자리니가 간신 위장하느라 귀족과 거리를 둔 건데 이런 사정을 몰랐음), 5권에선 리슈몽이 선선왕이 어린 앙리에타를 안아들고 기뻐하자 자신도 덩달아 기뻤다는 대사를 했지요.
필립 3세가 말년에 국정을 말아먹은 것도 아닙니다. 그 시절이 좋았다고 회고하는 사람도 많고, 마자리니나 위사대 등 충성스런 귀족이 많이 남아있을 정도니까요.
에스타슈를 숙청하고 난 후 재상의 공백기에 좀 삐끗했을 것 같긴 한데, 이것도 마자리니의 등용으로 해결한 걸로 보입니다. 22권에서 마자리니가 열풍 외전의 4인방을 회고하는 걸로 봐선 등용 시점은 필립 3세입니다.
2권의 앙리에타와 3권의 마리안느가 아예 게르로 떠나는 거(=보호받으러 가는 거)라고 해석될 수도 있는 대사를 한 적은 있는데, 이 둘은 세상 물정이라곤 모르는 자들이니 발언의 신빙성도 없죠.
앞뒤 맥락을 잘라먹어 오해가 커진 건데, 마리안느는 앙리에타가 순순히 결혼(순리대로라면 마리안느가 진작 했어야 될 일이지만)하도록 압박하고, 앙리에타는 압박을 받는 절박한 상황에서 한 대사입니다.
근위대인 왈드조차 마자리니가 말해주기 전까진 잘 몰랐던(2권) 앙리에타와 칩거만 한 마리안느가 현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설명했을 리가 있나요.
이건 정말 트리가 억까당한 사례입니다. 팬픽계에선 대체로 이 둘의 무책임함과 무능함(=아는 게 없음)은 엄청 까면서도(원작 내에선 마자리니가 방패가 된 덕에 안 까였음), 이 둘의 대사만큼은 정세를 정확히 판단한 거라고 이상할정도로 예우하는 편입니다.
트리 귀족들의 행실도, 충성심이 강한 자들이 많다는 묘사가 여러 번 나오는데도 죄다 묻힌 반면, 타르브 전 때 앙리에타가 귀족들을 질타(무서워서, 혹은 충성심이 없어서 미적거림)한 건 살아남아 막장국가 밈에 영향을 주었지요.
온실 속 화초의 땡깡이 어쩌다 트리 귀족들의 속마음을 정확히 꿰뚫은 일침(물론 진짜 그런 귀족도 있긴 했겠지만)으로 둔갑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매우 뻔뻔하고 개념 없는 발언이죠.
상황을 악화시킨 건 왕실의 직무유기이며, 제공권을 잃은 심각한 상태에서 승산과 뒷일은 생각도 안 하고 닥돌하자는 미친 발언이니까요. 심지어 이때는 루이즈의 허무도 몰랐을 때입니다.
팬픽을 본 적 없이 게르가 패전했다는 묘사부터 보면 트리가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먼저 들겠지만, 팬픽부터 봐서 강대국 게르가 뇌리에 남아있으면 같은 묘사를 봐도 게르 측에 사정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먼저 들 겁니다.
다른 대국인 갈리아의 견제 때문이라는 말도 안 통합니다. 갈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건 트리도 마찬가지인데다, 알비온과의 양면전쟁에 가까운 상태였지요(2권).
작중의 묘사를 보고 결론을 낸 게 아니라, 트리가 약소국이라는 결론부터 머릿속에 넣고 읽으니 거기에 부합하는(혹은 그렇게 보이게 착각할 수 있는) ‘대사’만 기억에 남을 수밖에요.
대사라고 강조한 건 ‘지금 당장 투입할 수 있는 트리의 공군력은 알비온보다 못 하다’는 걸 제외하면 다른 분야에서 타국보다 밀린다는 직접적인 묘사(해설, 등장인물이 직접 체험한 사실 묘사)는 작중에 단 한 번도 안 나왔기 때문이지요.
제로마의 밈의 절반 정도는 트리가 게르보다 약하다는 밈의 파생 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원작에선 약소국이 아니니 왜 약소국인지에 대한 묘사도 당연히 없는데, 애니와 팬픽에서 본 대로라면 약소국이어야 하니 이런저런 추측이 들어갔습니다. 이 추측들은 어느새 원작에 나왔던 묘사인 것처럼 퍼졌지요.
추측과 밈이 원작에서 미처 설명하지 못 한 부분이나 ‘나루토’의 3대 호카게 횡령설처럼 부족한 개연성을 채워주는 역할이라도 하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그것도 아니죠.
밈은 파생 밈을 낳고, 파생한 밈은 선행 밈을 더욱 강화하며, 어느 쪽이든 원작에는 없는 묘사를 기반으로 하니 파생 밈일수록 점점 더 원작과는 어울리지 않는 설정이 나오죠.
트리 약소막장국가 밈이 원작 설정으로 착각된 결과, 마자리니 정권 불안정 밈, 알비온 침공 반대는 충성심이 약해서라는 밈, 발리에르 공작 무책임 밈 등이 생겼습니다.
앙리에타가 인질로 팔려감, 부실한 군사력과 재정, 제일 심각한 평민 억압 등은 팬픽이 없었어도 헷갈릴 여지가 커서 그 자체는 밈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약소국 밈이 원작 설정으로 착각되는 데에는 큰 영향을 끼쳤지요.
원작에선 무모한 침공전만 제외하면 공작의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마지리니의 정권이 불안정하다는 묘사를 한 적이 없는데도, 막장국가 밈과 공작 필두귀족 밈이 원작 설정으로 착각당하니 왜 공작은 나라가 이 모양인데 왜 안 나섰냐는 밈이 생긴 거지요.
이 밈도 원작 설정으로 착각당하니까 이번엔 공작이 침묵한 탓에 나라가 막장이 되었다는, 선후 관계가 뒤바뀐 주장도 나오면서 막장국가 밈을 더 강화했고요.
알비온 침공전에서 보인 추태도 상식적으로 판단했기에 반대했다는 설정이 묻혀버리니, 능력이 애매한 장수를 보낼 수밖에 없는 사정도 묻히고, 트리군의 수준은 오래전부터 저열하다는 착각과 함께 약소국 밈의 근거로 쓰였어요.
게르도 장성급은 웬 돌격바보 한 명 보낸 게 다인 걸 생각하면 비슷한 사정일 수 있습니다(묘사가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음).
유능한 사람은 다 빼놓고 전쟁하는데 그걸 기준으로 삼는 건 너무한 일이죠. 6권에서 지휘관인 포와티에에 대해 논할 때 마자리니는 앙리에타를 안심시키려고 한 건지 쓸 만한 장수라고 했지만, 앙리에타는 속으로 범장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는 범장 이하였지요.
아마 인재는 안 왔다는 앙리에타의 한탄이 트리 군의 수준인 것처럼 와전된 것 같네요.
제일 왜곡을 많이 당한 건 앙리에타의 국혼입니다. 원작에선 트리-게르 양국은 서로가 서로에게 일방적으로 굽히는 관계가 아니지요.
그러니 실제 역사에서 카스티야의 이사벨+아라곤의 페르난도가 그랬듯이, 결혼만 하고 자신의 왕국 내에서 계속 왕으로 군림하되 서로 일절 간섭 못 하는 정도일 겁니다. 마침 이 2명은 레콘키스타를 완수한 자들이니, 어느 정도 의도한 작명이죠.
둘은 서로 견제하면서도 금슬이 나쁘지만은 않아서(+자식에겐 통일 에스파냐를 물려주려고) 같이 살았지만, 앙리에타와 황제는 둘 다 자기 왕성에서 거주하면서 우호 관계만 가끔 갱신해 줘도 됩니다. 정 안 되면 레콘키스타를 물리친 뒤에 이혼해도 되고요.
여러 번 결혼에 실패한 엘레오노르나 오스만의 딸(9권) 같은 사례도 있지요.
유럽에선 다른 나라가 같은 왕을 모시는 동군연합을 결성하기도 하고, 영국의 메리 2세+네덜란드의 월리엄 3세처럼 동군연합과 함께 부부가 공동으로 왕이 되는 사례도 있고, 반대로 왕위의 변동에 따라 해산한 사례(월리엄 3세가 죽으면서 1대만에 해체)도 있습니다.
앙리에타와 황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죠. 국력은 대등한데 정통성은 트리가 훨씬 앞서므로, 게르 입장에선 먹힐수도 있으니 갈라서는 게 좋습니다.
종교인 재상처럼 그냥 관례에 불과한 일인데, 아무래도 이런 역사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에겐 기괴한 일처럼 보이실 테니 막장의 근거로 채택된 겁니다.
때문에 트리가 일방적으로 합병당하는 처지라거나(이건 트리가 약소국이라는 착각 탓도 있지만), 앙리에타가 떠나면 빈 왕위는 어떻게 되느냐, 이런 걸 허용하다니 트리 귀족들은 생각이 있냐는 엉뚱한 분석이 나온 겁니다.
<트리가 약소국이라는 착각이 퍼진 이유?>
밈이나 루머라는 건 워낙 다방면으로 퍼지는 거니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제가 추측하는 이유는 아래와 같습니다.
1번째는 그냥 비중이 많아서 단점에 대한 언급도 많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단점이 많은 것과 지금 당장의 국력이 약한 건 관련은 있어도 동의어는 아니죠.
100년 전쟁 당시 프랑스는 영국에게 내내 깨지면서도 국력은 더 우위였기에, 영국군은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프랑스군을 상대하는 짓을 여러 번 해야 될 정도였죠.
세계 대전 때도 프랑스가 비록 6주 컷을 당했을지언정 열강이었던 건 틀림없고, 최근 사례로는 독일이 빗자루로 훈련할 정도로 군사력이 낙후됐지만 약소국이 아니죠.
단점도 너무 부풀려진 감이 있는 게, 평민 억압만 해도 타국에선 평민을 어떻게 대우하는지에 대한 묘사가 작중에 한 번도 나온 적이 없기 때문에, 트리가 ‘제일’ 심하다는 전제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평민을 채용하는 게르를 야만인 취급하는 걸 보면 차별이 심한 게 확실하다는 분석도 있지만, 확실하게 틀렸습니다. 오랜 전쟁에 의한 국민감정(1권, 열풍 외전), 대대로 약혼자 강탈(1권), 타국의 문화 표절(11권), 인신매매(타바사 외전) 등이 복잡하게 얽힌 문제니까요.
퀴르케의 말이 사실이라면 심한 게 맞지만, 마리코리누가 평민에게 기합을 받은 걸 생각하면 심한 게 아닐 수도 있죠. 둘 중 어느 쪽을 강조할 지는 팬픽 작가님들의 맘이지만, 원작에 제일 심하다는 묘사가 있다고 하면 왜곡입니다.
가난하다는 오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트리가 타국보다 경제력이 밀리는지 여부를 작중의 묘사로는 알 수 없으므로, 원작에 제일 가난하다는 묘사가 있다고 하면 왜곡입니다.
5권에서 불황이라는 말이 나오기는 하는데, 이거야 전운이 감도는 이상 당연한 일이죠. 9권에선 금세 경기를 회복했다는 묘사도 있으므로, 경제의 체급이 나쁜 건 확실히 아닙니다.
갈리아는 왕의 직무유기, 알비온은 내전의 여파, 로마리아는 작가 공인의 극심한 부정부패, 게르는 밈과 달리 트리와 처지가 같으니(21권. 원정으로 피폐해진 건 게르도 마찬가지라고 언급), 트리가 타국보다 사정이 나을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겁니다.
아마 왕실재산까지 팔아치운 것 때문에 생긴 오해 같은데, 이건 상당수의 귀족들이 무모한 짓 하지 말라고 협조를 거부했기 때문이라 국가의 재정과는 별개의 건입니다.
왕실재산 좀 보탰다고 함대를 재건할 수 있을 정도면 가난하다고 하기도 어렵죠. 5권에선 세금을 올렸다간 평민들의 불만이 커진다는 대사가 있는 걸 보면 증세도 많이 한 건 같진 않고요.
갈리아도 양용함대 건조할 때 5년간 1년 예산의 절반씩을 투입했다는 언급(15권)이 있으니, 반년 만에 수 십 척의 배를 건조할 정도면 재정이 휘청거리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배의 건조엔 메이지도 동원했을 테니 인건비도 많이 들 테고요.
유독 약해보이는 건 작품 초반부터 그렇게 보이는 묘사가 먼저 나온 탓도 있을 겁니다.
1권의 푸케 토벌이나 2권의 연애편지는 일개 학생에 불과한 주인공 일행을 서사의 중심으로 밀어 넣는 장치입니다.
주인공이 해결해야하니까 루이즈는 무턱대고 뛰어들고, 주위 사람들은 무능하게 나올 수밖에 없는데, 이런 것부터 보고 시작하니 앙리에타와 루이즈 개인의 무능+학원의 무능함(앙리에타와 달리 학원은 끝까지 개선되지 않음)이 트리 전체의 무능처럼 비춰질 수밖에요.
아마 귀족들이 타르브 기습전 때 미적거린 전적 때문인 것 같은데, 이것도 상황을 파악하며 함대와 병력부터 모으는 게 상식적인 판단(타르브 사람들 입장에선 비정한 판단이지만)이죠. 앙리에타 입장에서야 건실한 귀족도 많다는 사실을 몰랐으니 답답해서 간 겁니다만.
여기까지라면 창작물 특성상 비정한 판단을 거부하고 무모한 짓을 하면 주인공 보정으로 좋은 결과를 내고, 반대한 사람만 체면을 구기는 클리셰니까 괜찮습니다.
현실에선 지도자가 빨리 도망쳐서 도움이 된 사례(선조)와, 도망 안 치고 버텨서 희망을 준 사례(우크라이나) 둘 다 있지만, 이건 결과론이니 논외.
그런데 트리의 귀족들은 타르브 기습 때 왕이 간다니까 따라가서 함대의 포격을 마법만으로 버티는, 할 때는 하는 자들이라는 묘사가 버젓이 존재합니다.
충성스럽고 강단 있는 귀족도 많다는 이 묘사는, 약소막장국가 밈에는 어울리지 않으니 철저히 묻혔습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며 왕실의 발목이나 하는 막장 귀족들이 득시글거린다고 둔갑 당했지요.
제로마의 컨셉이 중간에 한 번 바뀐 탓도 있습니다. 1권은 학원물, 2권은 소수의 용사 파티가 세계의 위기에 뛰어드는 RPG 같은 전개입니다.
그러다 타르브 전 이후로는 국제 정세를 설명하면서 정치물이 조금 섞이고, 앙리에타도 퀘스트를 주는 NPC에서 중요 주연급으로 승격하고, 동시에 마자리니의 입을 빌려 무책임함도 더 부각시켰죠(8권. 전사자 통지서를 가져와 정신 좀 차리라고 보여 줌).
유혹이 특기인 걸 보면 캐릭터성이 겹치는 퀴르케를 빼고 대신 넣은 것 같습니다. 퀴르케가 이 바닥에선 츤데레 이상으로 불호가 심한 캐릭터니까 상업성을 생각하면 빼는 게 좋긴 하죠.
컨셉 변화에 의한 혼란은 나노하와 비슷한 사례입니다. 1, 2기는 액션이 과격할 뿐 마법소녀물이긴 하니까 넘어갔던 설정이, 군대물로 바뀌면서 소년병으로 바뀌어 버렸지요.
주인공인 루이즈의 캐릭터성이 왜곡당하면서 더 막장으로 보인 탓도 있지요.
루이즈가 열등감 때문에 무모한 짓을 하거나 세상 물정을 몰라 흰소리하는 등 무능한 건 맞는 말인데, 인성이 쓰레기라는 건 좀 과장이죠.
사이토를 사람으로 취급 안 해주는 건 1권에서 끝나고, 그 후엔 데레를 숨기기 위한 러브코미디적 폭행으로 전환되거든요. 츤데레라는 캐릭터성에 대한 호불호를 다른 부분에 억지로 끼워 맞춘 셈입니다.
위키에선 이런 깔아뭉개기가 사회에서 용인되니까 트리가 노답인 거라고 뇌피셜도 적혀있었고요. 중세에선 당연한 신분 차별이 노답의 이유로 왜곡된 거죠. 중세+이세계면 가치관도 다른 게 당연한 데, 현대인의 시각으로만 판정한 겁니다.
요즘의 이세계물이야 미개한 이세계를 현대인이 교화하는 내용이니 이런 판정도 전개의 일부지만, 이전의 이세계물은 상식이 아예 다른 곳에서 생존+고향 귀환이 메인이라 좀 안 맞죠.
게다가 사이토의 잘못은 싹 빼 버리고, 루이즈의 보복만 부풀려서 서술한 적도 있죠. 초반부엔 사고를 여러 번 쳤고, 8권에서 죽었다가 재회했을 때도 거사(?) 직전에 빈유라고 놀리는 등 산통을 먼저 깨서 응징당한 것인데도요. 이건 러브코미디의 얼빠진 남주 클리셰지 사이토의 인성 문제도 아닙니다.
거기다 애니판의 묘사인 알비온 군과 싸우고 겨우 살아 돌아온 사이토를 폭행하거나, 위험한 마법을 남용하는 민폐 짓을 원작 소설의 묘사인 것처럼 적어서 시도 때도 없이 폭력을 남발하는 막장 인성으로 왜곡했지요.
원래 ‘톰과 제리’ 류의 슬랩스틱 코미디에선 ➀A가 실수든 고의든 간에 사고를 침-➁B가 A를 응징함-➂응징 당하는 A는 프로레슬링처럼 접수 잘 받기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➀을 빼먹고 ➁만 적어놔서 B 역할인 루이즈를 싸이코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또한, 남주에게 폭력을 쓰는 여주는 러브코미디 장르의 문법입니다. 자기가 문단속 안 해놓고 알몸을 봤다며 뺨을 때리는 건 수많은 작품에서 나오는 클리셰죠.
러브코미디의 시조인 ‘시끌별’에선 라무가 헌팅을 일삼는 아타루를 전기로 지져버리는 묘사가, 지금도 연재 중이지만 시작은 동세대인 ‘금서목록’에선 미코토가 결투랍시고 전기를 쏘고 보는 등 전통으로서 성립된 것입니다.
현실에서 보면 상종하기 싫은 유형이긴 합니다만, 가상을 다루는 매체라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비현실적인 과장이 들어가는 건 국룰입니다. 제로마도 현실이었으면 사역마 소환은 납치, 응징은 폭행죄, 사이토의 하렘도 불륜이라 민사소송감이죠.
현실성을 가미하면 어떨까 상상하는 것도 작품을 즐기는 방법 중 하나이니 별 문제는 아닙니다. 민폐계 히로인에 대한 불호를 팬픽에 담아내는 것도 사람마다 취향이 다른 건 당연하니 별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캐릭터성의 표현이나 장르적 허용으로 봐야하는 부분까지 세계관의 설정으로 취급해버린 겁니다. 개그씬으로 넘겨야하는 부분까지 트리 귀족들의 평균 인성이라고 왜곡하니 막장국가라는 낙인이 찍힐 수밖에요.
2차 창작으로 놀 거면 거기서 끝내야지, 원작 설정으로 밀어주는 건 안 되죠. ‘원피스’로 치면 나미가 루피를 때리는 걸 보고 “파워 밸런스 실화냐”, “하극상 실화냐”고 정말 진지하게 따지는 셈인데, 왜 잘 먹힌 건지 지금도 의문입니다.
2번째는 마자리니의 겁주기(2권. 살아남으려면 동맹이 필수), 앙리에타의 설레발(2권. 편지 탓에 동맹이 깨지면 트리는 파멸), 오스만의 오판(3권. 타르브 전 당시 “게르는 우리를 버릴 셈인가?”라고 했음), 위에서 말한 퀴르케의 비웃음 탓입니다.
온실 속 화초인 앙리에타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마자리니는 그런 앙리에타를 설득하려면 부득이한 조치죠. 발리에르 공작의 말대로 장기전으로 버티는 방법도 있다고 하면 순순히 결혼을 하겠습니까?
오스만은 마리안느처럼 트리와 대등하게 싸웠던 시절의 게르를 염두에 두고 말한 것 같은데, 게르는 안 온 게 아니라 못 온 거였습니다. 3권의 해설로 직접 전쟁 준비가 전혀 안 된 건 게르도 마찬가지라는 설명이 나오니까요.
5~7권의 묘사에서도 게르군의 질과 숫자는 트리와 별 차이 없었지요. 21권에선 이것만으로도 나라가 피폐해졌다고 할 정도로 사정이 안 좋다는 언급이 추가로 나오고요.
게르의 제후들은 멸망의 위기에도 협조하지 않고 뻗대는데다(20권), 맘에 안 든다고 반란까지 일으킬(22권) 정도입니다. 오랜 숙적인 트리를 위해 참전에 순순히 응할 리가 없죠.
퀴르케는 비웃을 때 약해진 이유가 전통에 집착하기 때문이라고 했지만(3권), 이건 전장을 직접 목격한 기쉬와 마리코리누에 의해 반박(6권)됩니다. 열풍 외전에선 발리에르 공작이 총을 쏘는 등 전통이 이미 깨져가고 있다는 묘사가 추가로 나오고요.
사고치고 퇴학당한 뒤 결혼이 싫어 가출을 겸한 유학을 온 지 1년밖에 안 된데다, 공부를 열심히 사람을 불쾌히 여길 정도로 불성실하며(5권/타바사와의 첫 만남 회상 때 나온 말), 진짜 전장엔 가 본 적도 없으니(6권/멘누빌의 습격 때 나온 말) 현장을 제대로 알 리가 없죠. 트리가 게르보다 약하다고 한 것도 허풍이 아니라, 진짜 그렇다고 착각했을 가능성도 있네요.
이것도 앞뒤 맥락이 잘려서 퍼진 묘사인데, 전황을 학생들 나름대로 분석하는 진지한 씬이 아니라 기쉬가 야만스럽다고 얕잡아보니까 퀴르케도 욱해서 한 말입니다.
트리 마법‘학원’은 오스만의 방침 상 집착이 맞습니다. 제로마 세계관은 검술이 상당히 발전한 곳인데 전혀 안 가르쳤고(타바사 외전 보면 갈리아의 마법학원은 검술이 커리큘럼에 있음), 총이 한참 전에 대중화 된 것도 안 가르쳤죠. 퀴르케는 아마 학원만 보고 국가 전체가 이럴 것이라 지레짐작한 걸로 보이네요.
푸케와의 싸움(2권)을 보니 아인토벌 정도는 좀 한 것 같고, 갈리아에 잠입(10권)할 때는 몰래 여기저기 쏘다닌 경험을 살려 일행을 이끄는 등 학생 중에선 유능한 편이긴 합니다.
그런데 이 애매한 유능함+황제처럼 열등감을 숨기려고 그런지 오만한 구석도 있습니다. 틈만 나면 게르를 자랑하거나(심지어 과장이 많이 들어간), 10권에선 노출에 대한 문화차이를 트리 사람들의 자존심 탓하는 등 발언을 그대로 인용하기엔 한계가 많죠.
1권에서 루이즈가 소환마법만은 자신 있다며 허세를 부린 것과 차이가 없는 일이죠. 내심 루이즈를 신경 쓴 것도 자신과 동질성을 느껴서일지도 모르겠네요.
퀴르케가 한 말의 신뢰도 여부를 떠나서, 트리가 예전만 못하다는 말을 게르가 트리보다 강하다는 말과 동의어로 취급한 것부터가 비약입니다. ‘금서목록’의 엑셀러레이터가 말한 “내가 약해졌다고 딱히 네가 강해진 건 아니잖아”와 똑같은 사례죠.
설령 트리가 게르보다 10배 이상의 강국이었어도 퀴르케 성격이면 트리가 게르보다 약하다고 주장했을 겁니다. 물론 반대로 기쉬도 마찬가지고요.
다만, 이 오해는 원작 탓도 큽니다. 허세 캐릭터는 기쉬처럼 극복하고 성장하는 장면도 같이 나오기 마련인데, 퀴르케는 중간에 비중이 증발해버리는 바람에 그만...
얘가 루이즈만큼이나 허세 캐릭터라는 것도 잘 모르시더군요. 마법 실력이 더 좋은 것만 빼면 기쉬와 별 차이도 없는 그냥 애죠.
게르의 비중만 너무 적은 것도 그렇고, 히로인에서 뺄 때 비중도 같이 잘렸나 봅니다.
3번째는 주인공이 속한 국가다보니 팬픽마다 주인공이 활약할 무대를 만들기 위한 제물로 쓰였고, 선입견과 각색이 계속 누적되었기 때문입니다.
‘남선’은 약소국 트리-강대국 게르의 구도를 맨 처음 만들고 유행시킨 작품으로, 퀴르케의 허풍을 트리의 현황으로 각색하고, 원작엔 없는 귀족파 때문에 왕권이 약하다는 묘사를 넣는 등 최약체로 각색했지요.
‘제독’은 비실전파의 흰소리를 과장해 마법만능주의 때문에 발전이 없는 것처럼 과장했고요.
‘씰브’는 원작에선 비실전파나 할 말을 세계관의 풍조로 과장(원작 학생들의 검술 무시를 과장해서 세계관 전체가 검술의 불모지인 것처럼 발언)했죠.
‘케티’는 위에서 설명했고, ‘루프’는 정신승리 운운한 걸 보면 ‘남선’의 각색을 원작 설정으로 착각한 게 확실히 보여서 생략합니다.
후대의 팬픽이 전대의 팬픽의 각색을 인용할 때도 있습니다. 팬픽 주인공을 띄워주려면 약할수록 좋으니까요. 참고가 아니라 진짜로 원작 설정인 줄 착각하신 작가님도 계실 거고, 그냥 쓰다 보니 비슷하게 수렴한 경우도 있겠지요.
예시를 하나만 들면, ‘제독’의 오리지널 설정인 “게르의 황제는 시조의 혈통인 앙리에타를 얻으려고 동맹을 맺어줬다”가 있습니다.
원작에선 혈기 넘치는 게르의 황제를 냉정한 정략가(연애편지가 드러나도 국익을 위해 덮을 사람)로 상향한 건데, ‘맺어줬다’라는 말부터 이미 ‘남선’의 각색인 강대국 게르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이 묘사는 위키와 ‘씰브’에서도 토씨하나 안 틀리고 똑같이 나왔습니다.
앙리에타 문서에선 이걸 두고 트리가 굽히는 거니까 사실상 합병이라는 뇌피셜이 적혀있었고요. 트리가 약하니까 공주를 팔아치웠다가 아니라, 팔아치우는 걸 보니 트리가 약소국인가보다, 라고 선후관계를 반대로 착각한 거죠.
두 작품이 잘 쓴 글인 것도 있지만, 약소국으로 오인하는 사람이 많다보니 오리지널 설정인데도 그럴듯한 설정으로 취급받은 겁니다.
또한, 게르의 단점인 미약한 중앙권력, 로마리아의 단점인 경직된 정치체제(이건 네프테스도 마찬가지)+또 다른 단점인 지도자가 손 쓸 수 없을 정도의 부정부패를 트리에게만 싹 몰아줘서 알비온‘보다는’ 약한 걸 게르‘보다도’ 약한 최약체로 만들기도 했죠.
자존심만 원작 그대로 둬서 허세 국가로 만든 건 덤이고요.
반대로 필립 3세 전승의 비결인 능력주의(본인이 직접 인증)는 게르에게 줬지요.
평민 채용까지는 5권의 해설로 직접 설명했지만, 그 외엔 퀴르케가 조금 떠든 것이 전부라 진짜 능력을 제대로 보는 건지, 공명첩 수준인지, 사회 구성원들이 잘 받아들였는지조차 안 나왔습니다.
전장을 본 적도 없으면서 자신감만 넘쳤던 퀴르케(6권), 돌격바보인 하르덴베르크(7권), 상황파악 못하고 굳이 앙리에타를 도발해놓고 조셰프의 도발엔 새파랗게 질려서 침묵한 황제(8권. 20권에선 정신 좀 차렸는지 교황에게도 할 말은 하는 사람으로 바뀜) 등 딱히 유능한 모습을 보여 준 적도 없고요.
일부 팬픽의 묘사대로 능력주의가 대세였다면 알비온 침공전 때 트리 군의 진격만 뒤처진다거나, 게르 군이 비웃는 묘사 정도는 나왔을 겁니다.
초기 팬픽인 ‘남선’에선 기술력은 좋은 국가정도였다면 후기 팬픽인 ‘씰브’와 ‘루프’쯤 가면 기술과 능력을 중시하며 유일하게 마법 외의 분야도 발달한 초강대국으로 재탄생했습니다.
게르였다면 순수기술로 만든 것도 인정받았을 것이다(루프)라던가, 콜베르의 진가를 알기도 전의 퀴르케가 검을 만드는 기술에 관심을 보인다(씰브)거나 편애도 엄청 받았지요.
위키에선 이걸 두고 산업혁명의 태동이 보인다는 뇌피셜이 적힌 적이 있었고요.
할케기니아엔 엔진을 만들 정도의 야금술은 없다고 해설으로 직접 설명했으니(6권) 이건 콜베르의 기술력인데도 은근슬쩍 게르의 기술력으로 둔갑했습니다.
퀴르케가 장식용 검을 못 알아보고 그냥 사거나(1권), 정전기를 독 취급하는(13권. 이건 개심 후) 등 순수기술엔 무지하다는 묘사가 나오는 데도요. 마법만 배우는 학생이니 모르는 게 당연하기는 한데, 그럼 기술력을 자랑하는 발언도 인용하면 안 되죠.
화자는 같은 사람인데 게르에게 유리한 발언만 설정으로 인용하면 그게 바로 왜곡이죠. 자랑할 때 반박이 없었으니 상대도 수긍한 셈이라는 말도 안 통합니다. 청자가 세상 물정 모르는 학생과 아예 외부인인 사이토였으니까요.
인용할 거라면 노트북의 외형을 보고 게르의 세공품 같다(13권)는 발언이 적절하죠. 화자가 기술 분야의 전문가인 콜베르거든요. 이것도 기술력이 좋다는 말인지, 게르의 세공품엔 직각형이 많다는 뜻인지 애매하긴 하지만 아무튼 잘 만든다는 뜻이긴 하겠죠.
선입견이 강해지니 원작의 묘사를 보완하면서 팬픽을 쓰는 게 아니라, 팬픽의 묘사에 맞추기 위해 원작의 설정이 왜곡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기쉬는 평민을, 퀴르케는 콜베르를 무시하다가 성장한 걸 두고, 트리 측은 대부분이 성장 전의 기쉬인 것처럼 과장해서 막장 국가, 게르 측은 대부분이 성장 후의 퀴르케인 것처럼 과장해서 선진 국가로 취급했지요.
일부 팬픽에선 게르만 고루한 전통에서 탈피한 실용적인 국가라고 띄어주는데, 원작에선 그런 적 없어요. 콜베르가 전통적인 귀족답지 않게 행동하자 가장 앞장서서 조롱한 게 퀴르케였고(6권), 알비온 침공전에 참전한 하르덴베르크(6~7권)와 트리의 수도에 체류하던 게르의 기사들도 모욕당했다며 결투부터 운운(열풍 외전 부록)하는 전통적인 귀족이었지요.
필립 3세가 승리의 비결은 능력주의라고 자신만만했던 걸(반대로 말해 타국은 아직) 보면, 오히려 트리가 먼저 도입했고 수도에 체류하던 게르의 기사들이 귀국한 뒤 퍼뜨린 것일 수도 있습니다. 도입은 게르가 먼저 했는데 먼저 실현한 건 필립 3세일 수도 있으니 속단할 정도는 아니지만요.
수도에 왜 게르의 기사들이 체류 중인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은 없는데, 외전 1권에서 게르는 필립 3세에게 한 번도 못 이겼다는 언급이 있고, 공작에게 폭행당해도 별 항의 못 했고 트리 왕실도 별 신경 안 쓴 걸 보면 포로나 인질에 가까운 것 같네요.
게르 기사들의 지팡이를 안 뺏었다는 묘사 때문에 오해할 수도 있는데, 유럽의 귀족들은 근대까지도 포로로 잡았을 때 명예를 믿고 칼, 총, 갑옷 등의 무장해제를 철저히는 안 하는 게 관례였습니다.
기쉬와 퀴르케가 서로 디스하는 묘사를 두고도, 위키에선 게르 측은 통렬한 비판이라 띄어주고 트리 측은 현실감각 없이 멍청하다고 까인 적이 있죠.
실상은 세상 물정 모르는 학생 2명의 자존심 싸움에 불과하며 그냥 양국이 앙숙이라는 걸 보여주는, 중요한 묘사도 아닌데 국제 정세를 논한 것처럼 과장되었어요. 그냥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가 독일보고 훈족 운운한 거랑 비슷한 건데 은근슬쩍 주제파악 못 하는 놈들의 허풍으로 확대해석 당한 거죠.
애들이 괜히 저런 생각을 한 건 아닐 테니 어른 중에도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있겠지만, 국가 전체의 총의였으면 동맹을 맺을 생각도 안 했겠죠.
일개 학생인 퀴르케가 한 번 잘 한 일인 오스트란트 호 개발 지원은 콜베르 덕에 개심한 다음의 일+가문 차원에서 독단으로 진행한 사안(10권)인데도 게르의 우월함을 보여주는 묘사라고 과장된 반면에...
고위귀족인데도 권력의 중추에서 밀려 지들끼리 우왕자왕하며 암살 실행범인 원소의 형제에게 역으로 쩔쩔매는(17권), 잡몹 포지션인 의장과 주변인들의 바보짓은 트리 귀족의 총의인 것처럼 과장되었죠.
작중에서 암살보다는 원소의 형제에게 데르플링거가 파괴된 일+루이즈와 떨어지자 급격히 약해진 사이토의 고뇌에 포커스를 맞춰서 이야기를 전개했는데도 이랬지요.
유능한 게르인이 많으니 게르를 강대국으로 판정한 게 아니라, 게르는 팬픽에서 본 대로 강대국이어야 하니까 게르인들은 유능하다는 설정을 나중에 덧붙인 거죠.
덕분에 퀴르케도 덩달아 식견이 높은 캐릭터로 상향을 받은 거고요. 허세 캐릭터란 걸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똑똑한 캐릭터로 보일 테니까, 얘의 발언도 신뢰성이 높다고 착각해서 그대로 세계관 설정으로 인용해버리는 악순환이 벌어진 겁니다.
반대로 트리는 약소국이어야 하니까 철들기 전 앙리에타나 아카데미 의장 같은 무능한 사람의 행적만 강조한 거고요.
마법의 신학 탐구처럼 단점 묘사가 나올 땐 엘레오노르를 인용한 반면에...
왈드의 어머니나 엘레오노르의 친구 발레리가 성차별이 심한 시대에 능력만으로(엘레오노르는 가문 빨도 있을 테니) 아카데미에 채용됐다는 장점 묘사가 나올 땐 존재 자체를 지워버렸죠.
또한, 원작은 트리가 강소국 정도라는 걸 전제로 진행하는데, 사람들이 인식하는 트리는 최약체+막장국가이니 간극을 메우기 위해 멀쩡한 인물도 너프된 채로 기억되었습니다.
상식적인 판단을 했을 뿐인 발리에르 공작이나 충성을 바친 트리의 귀족들을 싸잡아서 무책임한 놈이거나 리슈몽 후작 같은 놈이라고 왜곡했지요.
왈드의 배신을 트리의 막장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왜곡한 팬픽도 있었습니다. 얜 지극히 사적인 이유로 배신한 거라 트리가 최강국이었어도 배신했을 놈인데도 말입니다.
안드바리의 반지나 허무 같은 작중 인물은 절대 예상할 수 없는 치트만 아니었어도 큰 문제가 없었을 트리가, 어느새 전쟁이 없었어도 알아서 무너질 위기의 실패 국가로 둔갑한 겁니다.
이건 너무 많은 수의 팬픽이 나온 게 문제가 된 사례입니다.
똑같이 소환계의 대모 취급을 받은 fate의 경우, fate zero 애니가 첫 방영했을 때는 대인배 이스칸달이나 호구 세이버 밈이 인기를 끌었지만, 지금와선 너무 이질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처럼 팬들이 재평가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반면 제로마는 fate에 비하면 마이너한 IP라 팬들의 재평가도 저조(그나마 쓰레기 루이즈 밈은 많이 줄었음)해서 일부 팬픽에서 정립된 이미지가 안 없어지고 계속되고 있죠.
4번째는 아마도 가장 결정적인 이유인 애니판 탓입니다.
원작의 묘사로는 약소국 밈의 근거를 채울 수 없으니 애니판의 설정도 끌어온 것 같네요.
애니판의 등장인물들은 다들 원작보다 무능해서 트리가 더 막장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본인들은 하는 거 없이 주인공 일행에게 다 떠넘기죠.
타르브 전에선 트리가 비공선이 아예 없는 국가인 것처럼 나오더군요. 아마 함대전을 그리는 게 힘들어서인 것 같은데, 원작 소설 내 트리의 군사력이 부실한 근거로 쓰였지요.
애니 오리지널 인물인 모트가 시에스타를 억지로 데려가려는 걸 보면서 평민을 저렇게 하찮게 대하는 걸 보니 원작 소설의 트리는 막장이 확실하다는 근거로 쓰인 적이 있죠.
애니판의 발리에르 공작이 앙리에타를 어리다고 무시하는 걸 보면서 원작 소설 내 트리 귀족들은 왕실을 무시한다는 근거로 쓰인 적도 있고요.
원작은 마리안느와 앙리에타는 막장이지만, 트리는 상당히 건실한 국가고 마자리니의 헌신 덕에 나라가 굴러가는 전개를 취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애니는 앙리에타가 히로인이라 부정적인 이미지가 너무 많아지면 안 되니까, 앙리에타의 실책인 알비온 침공전도 마자리니가 대신했고, 불륜 건을 제외하면 그냥 철없는 애로 상향(?)시켜주는 등의 변경점이 있습니다.
마리안느와 앙리에타에게 가야 할 욕을 트리가 대신 받았다고 해도 무방하죠.
5번째는 실제 역사에 의한 이미지 탓입니다. (댓글 보고 추가)
제로마가 유럽 고증을 상당히 잘 한 작품이라 그런지, 그대로 할케기니아에 대입하려는 경향이 좀 있지요.
트리는 국토의 위치와 크기만 보면 저지대(네덜란드+벨기에)로 보이지만, 실제 모티브는 프랑스(루이즈 등의 인명, 라 로셸 등의 지명, 영국이나 독일과 오랫동안 겨룬 전통의 강국)에 더 가깝습니다.
문제는 프랑스가 모티브인 국가라면 갈리아도 있고, 트리의 국토가 작다보니 프랑스를 연상하기엔 애매하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하필 국토의 크기는 제로마의 설정 중 완전히 오류인 드문 사례(7권의 지도, 설정 상의 국토 크기, 작중 도시 간의 거리 묘사, 위치에 대한 설정이 아예 없는 네프테스와 여러 대공국 등 전부 안 맞고 따로 놀고 있음)라서 보정도 불가능합니다.
모티브를 저지대로 한정해도 트리가 강국이라는 원작 설정과 충돌하지는 않습니다.
실제 역사의 루이즈 발리에르가 현역일 때는 네덜란드의 군사적 전성기로, 스페인의 아르마다를 단독으로 물리치고(영국은 칼레 해전의 후속 전투에서 털린 뒤 이탈), 런던항을 불태우고(2차 영란전쟁), 프랑스+영국 연합 함대를 격파하고(3차 영란전쟁. 이때 루이즈와 루이 14세의 아들도 병사), 루이 14세 때의 명장 콩데 공작도 네덜란드의 파리 침공(3차 영란전쟁에서 영국은 네덜란드에게 털린 뒤 이탈했지만 프랑스는 전쟁을 계속함)을 간신히 격퇴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전성기가 좀 짧아서, 루이즈가 궁정에서 물러나 수도원에 갈 때쯤엔 긴 전쟁의 후유증으로 영국에 제해권을 뺏기는 등 패권국에서 탈락, 점차 위성국 신세로 전락했지요.
트리도 발리에르 공작이 현역일 땐 불패의 패권국이었고, 은퇴하고 영지에 있을 땐 약소국은 아니지만(반년만에 함대를 재건하고, 급조한 메이지들만으로 함대의 포격을 막음) 패권은 알비온에 내줬습니다. 조셰프만 아니었으면 알비온이 계속 쥐고 있었겠죠.
다시 말해, 실제 역사를 제대로 반영해서 트리를 약소국으로 판정한 것조차 아닙니다. 약소국 트리라는 밈에 맞춰 저지대의 역사 중 불리한 부분만 가져다 붙인 겁니다.
반면에 게르는 독일의 역사 중 유리한 것만(기술 강국 등) 가져다 붙이며 강대국으로 판정했고요. 제후들이 황제에게 비협조적이었다는 신롬의 고증은, 강대국 게르가 원작 설정이 아니라는 게 알려지고 나서야 다시금 주목받았습니다.
전근대에선 당연한 관습이 현대인인 독자가 보기엔 어색한 탓에 트리만의 대단한 약점인 걸로 착각한 사례도 있습니다.
예시로, 서로마 말~근대 초의 유럽에서(동로마 제외) 성직자란 행정 업무를 수월하게 해내는 드문 인재입니다.
그래서 성직자가 재상, 섭정, 원정을 떠난 왕의 대리, 왕의 가정교사, 외교관, 재무관, 법관, 세속 영주의 대리, 리에주 주교령이나 메츠 공화국 등 소국의 군주, 군사령관, 시장, 촌장 등을 겸임하는 건 역사에 따로 기록하지 않을 정도로 당연한 현상이 된 겁니다. 중세 프랑스 재상의 4할 정도가 성직자죠.
또한, 지금이야 추기경 등의 임명을 교황이 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교황이 성직자 임명권을 온전히 갖고 있었던 시기는 의외로 짧아요.
카노사의 굴욕이라는 무리수를 두고 나서야 겨우 가져왔고(정작 무릎 꿇린 교황은 황제의 반격으로 추방됨), 근세 들어서 도로 상실합니다. 왕이나 영주가 하라고 하면 웬만해선 해줘야 하는 처지가 되죠.
실제 역사의 마자리니 추기경은 루이 13세가 임명했고, 실제 역사의 루이즈의 숙부 질 발리에르를 낭트의 주교로 임명한 건 루이 14세입니다. 추기경이나 주교도 어차피 왕이 임명했으니 다 같은 신하인 셈이죠.
마자리니의 재상 겸임이 트리 막장의 근거라는 건 처음부터 독자만의 착각이었습니다. 작중에서 마자리니가 경계 받은 이유는 간신 위장+로마리아인이라는 거였습니다.
앙리에타의 왕권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성한 영주들이 남아있으니 체제로 보면 절대왕정에 미치지 못 하지만, 앙리에타가 작중에서 행사한 권력은 절대왕정의 상징인 태양왕 루이 14세와 비교해도 별로 꿇리지 않을 정도입니다.
팬픽에 의한 선입견 탓에 앙리에타가 강력한 권력을 몇 차례나 행사했음에도 머릿속에서 잊어버린 탓도 있을 거고, 루이 14세의 권력이 ‘절대왕정’이라는 거창한 명칭과 달리 명~청나라나 조선에 비해 약한 탓도 있습니다.
한국인 독자들이 보기엔 저렇게 왕권이 약한데 나라를 어떻게 운영하냐?는 의문을 가지기 쉽지만, 유럽 기준이면 약한 게 아니에요.
귀족이라고 하면 프랑스 혁명기의 귀족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 풍조 탓도 있지요. 세금을 회피한다거나, 군역을 제대로 지지 않는다, 같은 거요.
지금은 없어졌지만 위키의 제로마 문서에 모티브를 고려하면 트리의 귀족들은 세금을 안 내는 게 확실하다는 서술이 있었을 정도인데, 원작에선 귀족들도 세금을 낸다는 언급(타바사 외전, 16권)이 떡하니 있지요.
국력이나 국제 정세를 보면 저지대가 모티브라고 해놓고, 귀족제를 보면 또 프랑스가 모티브라니, 선입견이 강하니까 불리한 것만 희한할 정도로 인용되었네요.
심지어 유럽 고증을 철저히 하면 설령 트리 약소막장국가 밈이 전부 원작에 나오는 설정이었다고 해도 약소국으로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루이 14세가 프롱드의 난으로 2번이나 수도에서 도망치면서 파리 인근이 초토화되어도 프랑스의 국력이 약했던 적은 없지요.
신롬은 황제가 제후들에게 일일이 협조를 구하면서 국정을 운영하거나 구성국들끼리 따로 노는 등 문제점이 많았고, 제국도 아니라고 조롱(사실 발언자인 볼테르는 조롱하려고 한 말도 아님)당했던 말기조차 나폴레옹과 전쟁 최전선에서 끝내 버티는 등 강국이었고요.
신롬보다 훨씬 왕권이 약했던 폴란드 연방도 오스만과의 전쟁에서 맹활약하는 등 군사력은 만만치 않았지요.
다시 말해, 왕권이나 국가의 결속력이 약하다고 해서 국력도 반드시 약한 건 아니라는 겁니다. 약해지는 유력한 원인 중 하나일 수는 있어도 약소국과 동의어는 될 수 없어요.
제로마는 위의 역사적 재평가가 넷에 퍼지기 전의 작품이니 고증의 수혜는 못 봤네요. 선입견이 너무 강해져서 퍼진 후에도 루머의 반박은 힘들지만요.
일부 이세계물에서 노예를 잔뜩 부리고 타국에 계략을 수시로 거는 악의 제국도 점점 곪아가는 막장 상태라도 당장의 국력이 약하다는 묘사는 잘 안 하지요? 트리도 주인공이 속한 세력이 아니라 상대측이었으면 약소국 밈은 안 생겼을 것 같네요.
또한, 저지대와 신롬의 관계를 그대로 대입하는 건 안 됩니다. 할케기니아는 근세 유럽과 비슷한 거지 정말로 유럽인 건 아니니까요.
트리는 오랜 세월 봉신국이었던 저지대와 달리 오랜 역사를 가진 전통의 강국이고, 반면 게르는 프랑크 왕국에서 이어진 근본국가인 신롬과 달리 도시국가에서 출발해 다른 도시국가들을 합병해 덩치만 불린 신흥국입니다.
인구와 인프라에서 정통 4대국에 비해 손색이 많을 수밖에 없지요.
게르는 신롬 외에 러시아를 모티브로 삼은 것도 몇 개 있습니다.
같은 유럽권이면서도 여러 방면에서 좀 겉돌고 뒤처진 분야가 있다거나, 약한 건 아니지만 덩치에 비하면 실속이 없어 전쟁에서 여러 번 깨진다거나, 혈통과 별개의 작위 분배는 표트르 1세의 관등제 비슷하고, 퀴르케의 풀네임도 예카테리나 2세의 본명에서 따왔지요.
야만인으로 취급당하는 것도 타타르의 멍에 때문에 유럽 취급을 못 받았던 루스 차르국과 사정이 비슷하고, 타국을 압도할만한 강국도 아니면서 황제를 자칭한 것도 게르의 황제와 비슷한 처지죠.
6번째는 독자만 알고 있는 정보와 작중 인물이 알고 있는 정보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탓입니다.
마자리니가 충신이라는 건 독자만 알고, 작중 인물들은 전혀 모르죠. 2권에선 앙리에타보다 화려한 마차를 과시했을 때 다들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참는다는 묘사가, 13권에선 나라를 집어삼키려 했다는 오해가 겨우 풀렸다고 나레이션으로 대놓고 설명해 줍니다.
발리에르 공작처럼 나라를 생각하는 귀족들이 많으니까 간신(으로 위장 중)인 마자리니를 경계하고 마지못해 협조하는 게 원작의 묘사입니다(6권).
그런데 충신이라는 걸 다들 알고 있다는 단서를 달아버리니까, 귀족들이 나라의 기둥인 마자리니에게 협조하지 않고 복지부동하는 탓에 마자리니와 앙리에타가 조별 과제의 조장 노릇을 한다고 해석되었습니다.
원작의 묘사는 그대로인데, 전제 하나 잘못 잡으니까 의미가 정반대로 왜곡됐지요?
이 왜곡의 제일 큰 피해자는 발리에르 공작이죠. 마자리니가 간신이라서 싫다는 대사가 멀쩡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원작에는 왜 둘의 사이가 나쁜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느니, 왕실과의 사이도 나쁘다느니, 겨우 자존심 때문에 조정에 출사하지 않는다느니 별 음해를 다 받았지요.
또한, 트리의 귀족들은 멸망의 위기에 뭘 하고 있냐는 말을 많이 듣는데, 이것도 황당한 비판입니다. 조셰프와 교황의 광적인 음모를 작중 인물들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어요.
작중 인물들에게 제일 큰 위협은 레콘키스타인데, 이것도 트리는 당장 투입할 수 있는 공군력만 좀 딸리는 거지, 툭 치면 무너질 약소국이 아니니까 무모한 짓만 안 하면 불리한 싸움이라고 여길지언정 멸망의 위기라고 여길 여지는 적어요.
당장 레콘키스타의 장성들부터가 승산이 없다고 절망하다가 갈리아의 원군이 올 거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희망을 가졌지요(6권).
안드바리의 반지의 세뇌 효과는 주인공 일행조차 완결 이후에도 모르므로, 내전으로 알비온의 전력은 크게 깎였을거라 생각하는 게 상식적이죠. 조셰프가 내전의 흑막인 것 역시 주인공 일행조차 몰랐으니, 당분간은 그들이 재정비에 힘쓸 거라고 예상하는 게 상식적이죠.
알비온 침공 반대 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발리에르 공작을 비롯한 귀족들은 안드바리의 반지를 모르니 장기전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 수 없고, 허무를 모르니 단기전+무모한 작전에 승산이 약간은 있다는 걸 알 수 없죠.
허무 없이는 얼마나 무모한 작전이냐면, 첫째, 3000m 상공을 향해 막대한 풍석을 소모한 상태에서 연합군보다 더 강한 공군력을 가진 적을 상대로 함대전에서 압승. 둘째, 현대의 군대도 하기 어려운 상륙전을 완벽히 수행. 셋째, 육상전에서 내전으로 단련된 적을, 갓 징집해서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지휘할 장교조차 부족한(마지막에 무질서하게 패주한 이유) 아군이 승리. 이런 작전을 찬성하는 건 미친 짓입니다.
앙리에타의 복수심도 알 길이 없고(웨일즈와의 관계를 모름), 4권의 앙리에타 납치 미수 사건도 공개하지 않았으니(6권. 앙리에타가 아니라 마자리니가 추진한 것처럼 공표), 왜 굳이 지금 무모한 꼬라박을 하겠다는 건지도 이해할 수 없죠.
왕이 납치당할 뻔했는데 왜 바로 반격 안 하냐고 질타하는 글도 있던데, 몰랐으니까 그런 겁니다. 공개를 안 한 이유는 설명이 없는데, 아마 앙리에타에게도 심각한 약점이라는 점과(중간에 따라간 건 사실이니), 책임을 마자리니가 몽땅 질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작중 인물들이 가진 정보 내에선 반대가 합리적인 선택인데, 모든 정보를 다 알고 있는 독자들이 보기엔 당장 나서야 할 위기에 몸을 사리는 쓰레기처럼 보일 수 있죠.
알비온과의 전쟁 자체를 반대했다고 왜곡 당한 것도 이 착각 때문일 겁니다. 무모한 침공전‘만’ 말렸을 뿐, 공작과 마자리니는 장기전으로 말려 죽이는 정석적인 작전을 원했지요(6권).
사이토의 승작에 대해서도 독자들이 착각하기 쉽습니다.
독자들은 사이토가 목숨을 걸고 큰 활약을 했으니 당연히 큰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작중 인물들은 거의 모르고 그냥 앙리에타의 공표로만 알고 있죠.
우선, 루이즈와 사이토 콤비는 존재 자체가 기밀이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묘사됩니다(6~7권). 위에서 설명한 함장도 사이토에 대해 몰랐고, 루이즈의 부모님조차 루이즈의 허무에 대해선 한참 후(11권)에나 알았지요.
7만 대군과 싸운 것도 애니판에선 그냥 정면으로 돌격했으니 목격자가 많지만, 원작은 아닙니다.
아군은 죄다 도주+적군의 절반은 안드바리의 반지로 세뇌 상태+멀쩡한 알비온 군도 사이토를 본 건 소수입니다. 기습당한 장교들과 사역마의 감각 공유로 멀리서 본 소수의 메이지 척후병들 정도죠.
안개가 심하게 깔린 상태에서 지휘하는 장교만 기습한 뒤 즉시 후퇴하고, 혼란을 수습하고 나면 다시 기습하는 방식을 여러 번 반복해서 진군만 늦춘 거지(알비온군 중에서 사망자가 안 나온 것도 이 때문), 7만 대군을 혼자서 섬멸한 게 아니에요.
비유하자면 삼국지 조운의 장판파 전투의 연의 버전과 정사 버전의 차이 정도?
알비온전은 7권으로 끝이지만 이때의 공적이 대중에 알려진 건 16권입니다. 갈리아 내전에서의 활약은 그렇다 쳐도 알비온전에서의 활약은 이제 와서라는 느낌이 드는 뒤늦은 공표라, 앙리에타의 프로파간다가 아니냐는 의심이 들어도 이상할 게 없죠.
알비온군이 패배의 충격 혹은 광역 세뇌 탓에 제정신이 아니었냐고 몰고 갈 수도 있고요.
정황 증거만 있고, 제대로 된 증인도 없고, 헛소문으로 덮어버리는 것도 어렵지 않은, 당대의 상식으로는 의심스러운 활약상인데도 앙리에타가 발표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의장을 비롯한 고위 귀족들마저 공적 자체는 감히 부정하지 못하고 순순히 받아들였지요.
앙리에타가 왕권 강화를 위해서 사이토를 끌어들이는 게 정치적으로도 유리하다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만, 보시다시피 틀렸습니다.
사이토의 인기는 앙리에타의 인기가 사이토의 활약을 보증했기에 만들어진 것이므로, 전제부터 성립하지 않습니다. 도움이 안 되는 건 아닌데 극적인 차이는 당연히 없지요.
만약 15권에서 갈리아의 기사들 여러 명을 결투에서 제끼는 활약을 안 했으면 왕의 보증이라도 못 믿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 정도라면, 사이토 외에도 카린느까지 갈 것 없이 왈드, 콜베르 급의 메이지나 발리에르 공작처럼 소드 마스터+사격술을 익힌 강자라면 마법 없이도 할 수 있는 일이죠.
민중들 입장에서도 평민인 게 기적이지, 전공까지 기적인 게 아닙니다.
엄청난 은혜를 입었는데도 불만을 품었으니 막장이라고 주장하는 글도 있더군요. 맞는 말이긴 한데, 이것도 독자만 알고 있는 정보 탓에 위상이 좀 과장됐습니다.
독자들 입장에선 사이토가 트리를 멸망의 위기에서 구한, 대체 불가능한 구국의 영웅이지만, (주인공 일행은 제외하고)작중 인물들 입장에선 전쟁 영웅들 중 1명이거든요.
침공전에서의 유일한 공로자였다면 또 모를까, 팬픽계에서 하도 저평가 당해서 그렇지 열심히 싸운 트리 귀족들도 굉장히 많았기 때문에 그조차 아니죠. 참전자들 입장에선 사이토만 특별 대우라고 착각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우선, 타르브전과 알비온 상륙전에서의 활약은 허무를 숨겨야 하니 대외적으로 공표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부터 일단 공적이 크게 깎이죠.
둘 다 목격자도 없습니다. 타르브전은 루이즈와 사이토만 갔고, 상륙전은 호위대가 전멸했고(티파니아가 나중에 살려주긴 하지만), 그때 다른 병사들은 전부 다른 상륙지에 갔지요.
상륙전 이후라면 더 이상 무모한 싸움에서의 기적이 아니라, 충분히 해 볼 만한 전장에서 활약한 거니까 극적인 효과도 떨어집니다.
이때는 (사실은 유인책이었지만)사우스고타를 점령하며 한창 승승장구할 때라, 앙리에타도 더 밀어 붙이면 이길수 있는데 왜 휴전(시조 강림제엔 휴전이 관례)해야되냐고 불평하는 장면도 있지요(6권).
침공에 실패했다면, 이번에야말로 귀족들이 주장하던 대로 우주 방어로 버티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드는 게 상식적이고요.
상륙전부터 계속 이겼으니, 마지막의 퇴각은 전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운이 없어서 일어난 일로 여길 테고(사실 맞는 말), 적은 남은 함대마저 상실했고, 아군은 침공에 반대했던 귀족들이 실질적인 주력을 데리고 지상에 남았으니, 방어전을 위한 전력이라면 충분하니까요.
7권 이전 시점에서의 전쟁 영웅은 타르브 전에서 함대의 포격을 목숨걸고 막은 귀족들, 전설의 피닉스를 불러 낸(마자리니가 대충 내뱉은 거지만 작중 인물들의 입장에서는) 앙리에타, 상륙 직전의 불리한 함대전에서 (루이즈의 허무 덕이지만)승리한 공군입니다.
사실 공적을 제일 인정 못 받은 건 사이토가 아니라 루이즈죠. 왕위 계승권이 올라간 것도 대외적으로는 전쟁의 공적 덕에 받은 게 아니고, 교황의 프로파간다지만 성녀로 취임한 것도 갈리아 내전 탓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15권에서 갈리아의 침공을 막아낸 후에는 목격자가 많아서 사이토도 구국의 영웅(침공전 이후 피폐해진 상황이라 위기이긴 했으므로)으로 취급받기는 하지만, 이것도 공적을 수정령 기사단이 나눠 가지는 바람에 좀 희석됐습니다.
더 큰 공적인 요르문간드 전도 성당기사단들이 죄다 적전도주 했으니 목격자가 없어요. 얘들은 알아도 증언을 거부했을 것 같긴 하지만요.
독자들의 착각대로 유일한 구국 영웅이었으면, 작위를 못 받고 슈발리에로 끝이었을 때, 평민이나 참전자들부터 들고 일어났을걸요? 수정령 기사단도 애들이 아니라 성인이라 정치적 경험이 있었다면 건의했을 테고요.
암살 음모를 꾸민 자들조차, 정계에서 밀려난 상황이라지만 나름 고위 귀족인데도 사이토에 대해선 소문으로만 알고 있을 정도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22권에선 성당기사단(심하게 무능한 집단이긴 하지만)도 사이토에 대해 잘 몰랐고요.
교황의 측근을 제외하면 작중 인물은 대륙 융기나 교황의 음모에 대해서도 알 수 없으므로, 전란이 끝났으니 토사구팽 각이라는 생각이 들어도 이상할 게 없죠.
그러니 의장도 암살하면 앙리에타가 나중에는 고마워할 거라는 정신 승리나 했고요.
<원작은 오류, 팬픽은 정설로 취급하는 풍조>
위에서 말했듯이 예시로 든 팬픽들은 다들 잘 쓴 글입니다. 각 팬픽 내적으론 설정 및 개연성 오류도 적지요. 잘 쓴 걸 가지고 뭐라 하긴 좀 그런데, 2가지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오류 없이 잘 짜인 걸 보니 각색인 걸 몰라보고 원작의 묘사가 맞다는 잘못된 확신을 준 점이고, 다른 하나는 원작의 저평가로도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다행히도 “팬픽의 설정이 더 우월하니 원작 설정보다 우선시해야 한다!” 같은 극단적인 의견은 주류가 아닙니다.
제가 지적하려는 건 원작의 팬을 자처하는 분들 중에도 원작의 설정과 팬픽계의 밈이 충돌할 때, 자신이 설정을 헷갈린 건가 자문하는 게 아니라 그냥 원작 탓으로 돌려버리는 사례가 종종 나온 현상입니다.
‘루프’가 딱 이렇죠. 게르가 전패했다는 열풍 외전의 해설과 게르 강대국 밈이 충돌하니, “게르가 트리를 압도한다는 건 원작 설정이 아닌 건가?”라는 의견은 안 나오고, 원작에서 대강 넘긴 거고 사실은 트리가 정신승리를 한 거라는 분석(?)을 내놓았죠. 이래서 선입견이라는 게 무서운 겁니다.
원작과 팬픽을 따로 떼고 보면 각자 괜찮습니다. 밈에 너무 길들어진 나머지 원작의 묘사와 팬픽의 묘사를 구분할 생각을 잘 안 한다는 게 문제입니다.
예시로, 타르브 기습 때 트리 왕실의 권위가 미약하다는 밈과 트리 귀족의 대다수가 쓰레기라는 밈을 넣었다고 가정해보죠.
그럼 타르브의 영주가 전사하면서까지 시간을 버는 장면도 없어지고, 앙리에타 곁에서 목숨 걸고 함대의 포격을 버텨낼 귀족도 없어지죠. 루이즈가 오기도 전에 앙리에타와 마자리니가 전사할 겁니다.
이런 충성스러운 귀족은 소수 아니냐는 말도 안 통합니다. 소수의 메이지만으로 함대의 포격을 장시간 견딜 수 있다면 메이지가 제일 많은 트리가 약소국인게 말이 안 됩니다.
루이즈가 1권에서 귀족의 비율은 1할 정도라고 했지요. 메이지가 귀족보다 더 많다는 걸 감안하면 트리는 메이지가 정말 많다는 소리입니다.
‘제독’에선 기습을 미리 간파해서 게르의 함대와 합동으로 매복했고, ‘케티’에선 주인공 일행이 훨씬 빨리 도착해서 버틸 필요도 없이 끝냈고, ‘씰브’는 타르브 기습이 나오기도 전에 알비온 내전을 끝냈습니다.
작품 내적으론 모순이 없도록 잘 각색했지만, 밈을 원작 설정으로 착각한 분이 보기에는 무모하게 출진한 앙리에타가 살아남은 걸 팬픽에서 보충한 것처럼 보이겠죠.
‘제독’과 ‘씰브’의 게르가 ‘혈통을 위해’ 동맹을 맺어줬다는 설정은, 게르를 강대국으로 오인한 사람이 보기엔 원작에선 설명해주지 않은 동맹의 이유를 보충한 것처럼 보이겠죠.
앙리에타의 국혼도, 마자리니 정권이 극히 불안정하다고 오인한 사람이 보기엔 반대가 심한 게르와의 동맹을 강행할 권력은 있다는 게 오류로 보이겠죠.
알비온 침공도, 트리의 왕권이 없다시피 하다고 오인한 사람이 보기엔 반대를 무릅쓰고 반절의 전력이나마 침공을 강행할 여력은 있다는 게 오류로 보이겠죠.
밈대로 왕권이 엄청 약했다면 무능한 것도 별 상관이 없습니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면 영향력도 없다는 말이니까요. 삼국지의 헌제도 실권을 모조리 뺏긴 상태라 정치인으로서 유능한지 아닌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여러 팬픽의 묘사를 원작 소설 하나의 묘사인 것처럼 우겨넣다보니 양립 불가능한 명제가 동시에 존재하게 된 겁니다.
‘남선’에선 영향력을 행사하되 팬픽 주인공의 교육 덕에 무능에서 점차 벗어나는 걸로 커버했지요. ‘씰브’에선 앙리에타가 납치 등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틈이 없어서 무능이 드러나는 일도 줄이는 것으로 커버했고요.
원작초월이라고 평가가 나올 정도의 팬픽답게 밸런스를 잘 잡은 건데, 이렇게 못 한 팬픽은... ‘케티’처럼 어물쩍 넘어가면 그래도 양반입니다.
‘제독’은 앙리에타의 머릿속이(이건 초반부의 앙리에타라면 사실이지만), ‘루프’는 귀족들의 머릿속이 ‘은영전’의 문벌귀족마냥 꽃밭이라 그렇다며 세계관 전체를 바보로 만들었죠. 이렇게 생긴 이미지는 그대로 원작 귀족들의 이미지로 둔갑해서 퍼진 건 덤이고요.
예시로 든 팬픽들은 트리는 너무 약하게, 게르는 너무 강하게 각색한 탓에 트리가 여태껏 살아남은 게 말이 안 될 정도의 격차가 생기는 오류가 있습니다. 이것만은 초월이란 평가를 받은 두 팬픽도 얄짤 없지요.
이게 팬픽 내에서만 쓰일 때는 트리가 아무리 약해도 팬픽 주인공이 잘 해결해 주니까 괜찮은데, 원작 세계관에 그대로 집어넣으면 당연히 문제가 됩니다. 이거 딱 1줄만으로 후속 전개도 모조리 엉망이 되거든요.
밈대로 격차가 심하다면, 황제가 파혼에 순순히 동의한 것부터 이상해집니다. 알비온에게 한 방 먹였다고 트리가 갑자기 강해지는 것도 아닌데요. 무난하게 이긴 거면 승전의 공적 덕에 발언권이 강해졌다는 말이라도 가능한데, 트리는 기습으로 함대를 싹 잃었습니다. 밈대로 재건이 불가능할 정도로 약하다면 더 고자세로 나올 테고요.
알비온 침공전 때 총사령관 자리를 트리가 차지하는 것도 어림없죠. 보호받는 처지일 정도로 약하면 병력도 게르가 더 많이 동원했을 거고, 그럼 총사령관도 게르 사람이었겠죠.
여기까지라면 함대를 파괴한 의문의 힘 때문에 몸을 사린 거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닙니다. 레콘키스타 측이 외교적으로 있을 수 없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타르브 기습전을 벌인 것도 이상해집니다.
원작의 트리는 만만치 않으니, 나중에 게르까지 상대하려면 최대한 피해 없이 싸우기 위해 비열한 방식을 써도 이상할 게 없어요. 게르도 알비온을 두려워하고 있으니(4권), 위력을 과시하면 일부 제후들은 항복시킬 수도 있겠죠.
반면에 밈대로 트리가 툭 치면 무너질 약소국이라면, 괜히 아군의 사기만 흔들릴 기만책까지 써가며 함대를 기습하는 건 말이 안 됩니다. 필립 3세 탓에 트리를 과대평가했다는 변명도 안 됩니다. 왈드, 리슈몽이라는 첩자가 있었으니까요.
똑같이 방심하고 있다면 더 우회해서 게르를 먼저 치는 게 낫죠. 이건 그래도 풍석 때문에 가까운 곳부터 먼저 노렸다고 하면 말이 되지만요.
밈대로 동맹을 구걸하는 처지라면, 트리 귀족들은 자부심이 강하다는 묘사(+함대의 포격을 메이지만으로 막으면서 그럴 자격은 있다는 묘사)와, 차기 왕위 계승권자를 타국으로 아예 넘겨주는(동군연합 같은 협력이 아니라 인질을 보내는 걸로 바뀌므로) 배알도 없는 자들이라는 묘사가 1권 안에 같이 나오는 설정 충돌이 발생합니다.
앙리에타의 첫 등장이 게르에서 협정 맺고 귀국(2권)하는 건데, 인질이었으면 못 돌아오고 바로 억류당했을 겁니다. 황제가 앙리에타의 외모에 혹한 걸 보면(8권) 더욱 그렇죠.
결혼까진 어쩔 수 없지만 앙리에타를 위험하게 만드는 건 마자리니의 캐릭터성과도 안 맞아요. 그럴 바에야 간신 위장을 발리에르 공작에게 밝히고 무릎을 꿇어서라도 협조를 구했겠지요.
위키에선 인질을 보낸 게 귀족들의 생각이 짧은 증거라고 설명한 적이 있고, 일부 팬픽에선 그냥 트리가 트리했다고 대충 퉁치곤 합니다.
이러면 알비온 침공전처럼 무모한 전쟁은 반대하는 판단력을 보여주는 묘사가 이상해집니다. 생각이 짧은 귀족이 주류라면 한 번 이겼답시고 그냥 들이받았겠죠.
사실 제로마처럼 개연성 오류가 적은 편인 작품이라면, 오리지널 설정이나 재해석이 들어갈 때 더 좋아지는 건 힘든 일입니다.
양산형(?) 팬픽을 보면 굉장한 사역마가 소환된 걸 확인해도 사역마의 의무랍시고 세탁을 시키는 장면이 나오곤 하더군요. 사역마는 거의 동물인데, 세탁이 의무일리가요.
사이토가 일반적인 사역마로선 쓸모가 없어 보여 하인 역할이라도 떠맡긴 것이 시작이니, 역량을 소환되자마자 보여주거나 최소한 인간만 아니면 이 장면도 없어야 합니다.
루이즈의 폭력성도, 사이토가 여러 번 사고를 친 전적(1권~2권) 때문에 심해진 거라서 사역마가 멀쩡하면 폭력성도 없어야 합니다.
연재 당시엔 루이즈가 욕을 많이 먹었지만 지금은 사이토에 대한 욕이 더 많은 게 다 이유가 있죠.
이세계에 적응을 못 한 것과는 별개로, 사이토는 초반부엔 위험한 사고뭉치였습니다.
오해였지만 강간 미수에 가까운 행위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루이즈 옷에 수작질 부린 것도 개그씬이라서 넘어간 거지 잘못됐으면 루이즈는 목이 부러져 죽었을 겁니다.
오히려 루이즈가 중세인의 상식선에선 잘 해 준 편이죠.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상식 밖의 얘기에도 미친 놈 혹은 거짓말이라고 더 추궁하지 않고(그럴 여력도 없긴 했지만), 노래까지 부르며 제로라고 조롱했을 때도 한 끼 굶기는 정도로 넘어갔고, 고용인에게 대충 떠넘기지 않고 식당에 직접 데려가고(그냥 식당도 아니고 마리코리누가 귀족용 식당이라고 한 곳), 투덜대니까 작게나마 고기도 직접 썰어다주고, 잠꼬대로 학생들 앞에서 조롱거리로 만든 것도 그냥 넘어가줬습니다.
물론 사이토야 현대인이니 이것도 불합리한 일이고, 끌려온 입장에서 배려라고 받아들일 여유도, 고맙게 여길 의무도 당연히 없지만, 루이즈 없으면 당장 굶어죽을 처지였는데 좀 겁이 없긴 했죠.
레콘키스타와의 내통자가 득시글거린다는 밈도 원작에 그냥 넣으면 이상해집니다.
그렇게 많았으면 멸망하는 한이 있어도 게르와의 동맹만은 안 된다고 뻗대거나, 타르브 전 때 다른 귀족들이 포격 막느라 정신없을 때 방해하고 도망치거나, 보고체계만 뭉개버릴 수도 있죠. 여기까지라면 앙리에타의 결단에 겁을 먹었거나 방해할 용기도 없는 소인배라서 그랬다고 퉁칠 수 있긴 합니다.
그런데 5권에서 앙리에타가 리슈몽을 비롯한 내통자를 숙청해버렸죠? 명단도 확보했겠다, 친구도 전장으로 보낼 정도로 눈에 뵈는 게 없어진 앙리에타가 살려둘 리가 없지요.
정말 득시글거렸다면 숙청 후 행정에 차질이 발생해야하는데, 반년 만에 함대 재건에 성공했을 뿐더러 민중들도 세금이 올라서 좀 힘드네 정도로 끝날 정도로 문제없었습니다.
트리가 오랫동안 약소국이었다는 밈을 쓰면, 왕이 없는 비상시에도 왕실의 권위는 여전하며 국체를 멀쩡히 유지한 점이나, 눈치 보기 바쁜 속국인 크루덴호르프 대공국의 존재도 말이 안 됩니다.
국경지대인 발리에르령과 그라몽령(17권에서 기쉬가 서쪽 끝에서 왔다고 했음+몽모랑시령과 이웃이라고 했으니 트리 남서쪽 라그도리안 호수와 인접. 씀씀이가 헤퍼서 가난할 뿐 피폐한 건 아님)이 멀쩡한 것도 어색해집니다.
트리 사람들의 강한 자존심도, 원작에선 오랫동안 불패의 강국이었고 본편 시점에서도 만만한 국가는 아니니 이상할 게 없는데, 최약체라는 설정을 넣으면 약소국 주제에 자존심만 비대한 노답 국가가 되어버립니다.
자존심이 강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으니 일부 팬픽에선 트리 사람들은 노답이 맞고 허세 때문이라며 지능을 통째로 하향하는데, 이러면 전후 빠른 재건이나 중진들이 허세 안 부리고 게르와의 동맹에 매달리는 모습이 어색해집니다.
마법만능주의 때문에 다른 분야의 발전이 없다는 설정을 쓰면 비공선부터 말이 안 됩니다.
천문학과 수학 없이 3차원으로 기동하는 비공선을 어떻게 만들고, 운용합니까? 비공선 운용은 마법과 상관없습니다. 2권의 선장만 해도 평민이었으니까요.
활과 쇠뇌만 가지고 미숙한 학생이라지만 메이지를 몰아붙인 용병도 있지요(2권). 정말 마법 외엔 발전이 없는 세계라면 무기도 부실할 테니 대항할 생각조차 못 해야 됩니다. 검이나 총처럼 만들기 어려운 건 아예 탄생조차 못 하고 창, 둔기, 슬링 정도만 있겠네요.
일부 팬픽에선 평민 채용 덕에 게르 황실에 대한 평민들의 지지도가 높다는 묘사를 했는데, 이것도 이상합니다. 마법 외의 분야는 발전이 정체된 상태라면 채용될 정도의 유능한 평민은 무슨 수로 나오고, 유능한지는 또 어떻게 판단하겠습니까?
평민 채용은 원작이 현대인천재론을 덜 써서 주인공의 개입 없이도 이미 발전 잘 하고 있는 세계관이라서 성립한 건데, 현대인천재론을 팍팍 쓴 팬픽에서 이러면 어색해지죠. 이건 그래도 장르적 허용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다만, 예시로 든 개연성 안 챙겼다고 바로 망작이 되는 건 당연히 아닙니다. 원작과 파생 작품의 설정을 혼동하는 건 어떤 장르든 흔한 일이니까요.
제로마가 설정오류가 전혀 없는 무결한 작품까진 아니고, 라이트노벨이라 다소 느슨한 묘사가 많은 것도 맞고, 오래된 작품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해진 것도 있을 거고, 반드시 외워야 할 필수교양도서도 아닌데 좀 착각할 수도 있죠. 그거 가지고 뭐라 할 생각은 없어요.
또한, 1차 창작이든 2차 창작이든 글을 쓰다보면 설정을 헷갈리거나 좀 바꿀 수도 있는 거고, 전개나 연출을 위해 개연성은 다소 희생할 수도 있죠.
사소한 것까지 다 챙기다보면 연재 속도도 엄청 느려지겠죠. 지금 이렇게 꼼꼼히 정리할 수 있는 것도 완결 난 작품을 옆에 끼고 느긋하게 정독하면서 쓰니까 가능한 거고요.
하지만 원작에 나온 적도 없는 설정과 묘사로 내려치기 당하는 건 부당한 일이며, 팬픽의 호평을 위해 원작을 깎아내리는 건 주객전도입니다. 원작 팬으로서 이것만은 불쾌했습니다.
팬픽 작가 분들은 이런 말 함부로 안 하시죠. 원작에 대한 경의가 있으니까 팬픽도 쓰셨을 텐데 함부로 내려치기를 할 리가요.
원작은 가벼운 글이지, 어설픈 글이 아닙니다. 저처럼 과할 정도의 원작 고증은 필요 없어도, 2차 창작을 접하는 사람이라면 작가든 독자든 원작에 대한 존중은 기본으로 깔려 있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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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A 스토판, 아이마스, 제로마, 죠죠 - 저도 잡담은 없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본문 내용과 상관있는 잡담 중에도 빼는 게 더 나아보이는 것도 있더라고요. 작가가 팬픽계의 동인설정을 원작설정으로 착각한 게 있어서 그런지, 잡담 중에도 착각에 동조해서 엉뚱한 분석이 종종 나오더군요.2025-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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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A 스토판, 아이마스, 제로마, 죠죠 - 오늘도 번역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스레민들이 콜베르에 대해 좀 오해한 게 있는데, 전기 연구는 다른 학자들의 업적입니다. 수는 적지만 연구자들이 있어서 라이트닝 마법과 자연의 번개가 같다는 것까지 증명했다고 13권에서 콜베르가 직접 얘기했습니다.2025-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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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게시판 - 22권에서 교황이 평민도 재능이 부족할 뿐 충분한 훈련을 거치면 마법을 쓸 수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메이지가 제일 많은 트리스테인에는 재능이 좋은 사람이 제일 많다는 뜻도 되니까, 말씀하신 메이지 전력의 우위는 바뀌지 않고 그대로지요.2024-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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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게시판 - 쓰다가 누락된 게 있었군요. 수정했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2024-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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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 에고, 요즘 창작게 쪽엔 잘 가질 않아서 칼럼 카테고리의 존재를 까맣게 잊었네요. 이미 올린 건 어쩔 수 없고 다음엔 제대로 올리겠습니다.2024-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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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A 호시린 / 타이거죠 - 생각해보니 평민채용은 필립 3세가 거의 최초로 시작했으니 저 이념을 이단으로 해버리면 앙리에타도 이단자의 손녀가 되버리네요. 오히려 다행인듯?2024-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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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A 호시린 / 타이거죠 - 발리에르 공작은 전작에 비해 원작과 가깝게 묘사되네요. 충성심이 높아서 전쟁을 반대한 걸, 여러 팬픽에서 충성심이 없어서 반대한 걸로 각색하는게 개인적으론 좀 불호였는데. 마리안느는 카린느가 첫사랑이었던 걸 공작으로 바꿨군요.2024-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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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A 호시린 / 타이거죠 - 그건 원작에서도 이유가 명확히 안 나왔습니다. 마자리니 성격을 고려하면, 침공전은 주인공 보정 없었으면 질 확률 100%였으니, 패전 책임도 자기가 다 뒤짚어쓰고 다음 사령관으로 공작을 세우기 위해서일 겁니다.2023-12-19
댓글목록 15
REXQ님의 댓글
크로이테님의 댓글
작중 귀족에게 있어 시조의 이름은 신이나 다름없는데 게르마니아는 그 시조와는 관계가 아예 없는 역사도 전통도, 뿌리도 허접한 국가....
이 뿌리가 단순 명예용도 아닌게 허무를 제하고도 헥사곤 매직 같은 왕족 전용 능력이 있는 걸 보면 짱 박아둔 게 얼마나 있느냐도 있지만 귀족들의 숫자나 혈통 등등도 뒤처질 수 밖에 없는 상황.
지구 상식으로 귀족의 영역에 평민을 들였다는 것은 작디 작은 귀족 사회를 허물어 국민 평균을 높이는 행위라 할 수 있지만 제로마 세계관에선.... 평균 내려치기, 원액에 물 붓기죠. 우린 인재가 없어서 얘들이라도 써야해요~ 라고 광고하는 거나 다름없는 헹위.
이게 원작 설정이 맞나? 싶지만 제 기억대로라면 평민들에게도 마법을 쓸 잠재 능력 자체는 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개화가 안 됬다는 건 귀족보다 질적으로 떨어지거나 교육을 못 받아서일테니 이걸 개선하려면 몇 세대는 필요하겠죠. 그나마 이 몇 세대도 평민에게 마법 재능이 있음을 전제로 하는 얘기니 저정도로는 어림도 없다는 거.
프라이즈님의 댓글의 댓글
이 말은 메이지가 제일 많은 트리스테인에는 재능이 좋은 사람이 제일 많다는 뜻도 되니까, 말씀하신 메이지 전력의 우위는 바뀌지 않고 그대로지요.
도끼님의 댓글의 댓글
정치체계는 추기경수상까지 있는 프랑스 복붙이면서 갈리아는 따로있고, 그럼 영토는 샤를마뉴의 서로마분할 생각하면 독일을 먹어야 되는데 게르마니아가 따로있음.
그래서 현실대비 남는 지도자리+알비온과 적극협조 설정으로 네덜란드 위치에 트리를 놓으니, 자연히 프랑스/독일에 끼이고 영국이 독립보장한 약소국 네덜란드 이미지가 됨.
개인적으론 아예 갈리아 위치에 트리를 놓고 갈리아 배역은 스페인 자리쯤에 줬으면 이미지 연상에 좋았을텐데.
아스펠님의 댓글의 댓글
도끼님의 댓글의 댓글
영/독/프 자리를 알비온/갈리아/게르마니아가 먹었고 이탈리아는 로마니아 교황청이니, 유럽지도 이미지상 동격 왕국이 연상이 안됨.
대역등에 많이 등장하는 위치를 생각하면 영/독/프/이탈리아(베네치아나 교황령)에 스페인정도.
확장판으로 아예 동롬이나 오스만은 많이 나와도 폴리투.헝가리, 북유럽,북아프리카등은 출연이 적음.
그러니 바로 연상되는 남는나라가 네덜란드에 추가로 스위스정도? 둘다 잘쳐줘도 '강소국' 이미지지 강대국이라기엔 좀.
키바Emperor님의 댓글
그냥 스토리만 즐기며 그렇구나하고 대충 넘겼다가 나중에 팬픽등을 보며 그 지식이 보완되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기는거죠.
당장 저도 원작 전부 소장중이지만 원작의 묘사나 설명등은 기억 안납니다.팬픽 설정등을 진짜로 알고있을뿐.
사이토와 루이즈의 관계는 초반에야 루이즈가 까였지만 갈수록 루이즈는 성녀로, 사이토는 노답으로 평가가 반전되죠.
항상여름님의 댓글
사유 : 내정해서 세금 만드는 것보다 걍 왕실재산 처분하는게 편해...
River님의 댓글
진행, 묘사 나름으로 깊이 있는 캐릭터가 될 수 있다고 보는데
아르니엘님의 댓글의 댓글
아스펠님의 댓글
왕관광대까마귀님의 댓글
프라이즈님의 댓글의 댓글
DawnTreader님의 댓글
- 나노하 시리즈의 하라오운 모자가 2차 창작에서 무개념의 관리국 제일주의자로 묘사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처럼요.
제로마도 연애물, 하렘물이란 표면적 이미지 땜에 그렇지, 알고보면 무척 고퀄리티 작품인데 말입니다.
골뱅C님의 댓글
감사히 잘 읽고 스크랩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