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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물_네타] [하얼빈] 각본가를 조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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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각본을 감독이 썼대요.

감독을 조져라.



'안중근이 어째서 그리고 어떻게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게 되었는가'를 알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호평을 할 만합니다.

다만 그건 저처럼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임'이라는 사실만 단편적으로 아는 사람에게나 그렇겠죠. 아마 영화적인 사정으로 고증을 어기기는 했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역사 지식이 충분한 분이라면 볼 필요가 없습니다.


영화로써는, 만듦새가 잘못되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중심이 안 잡혔습니다.

회상씬을 이용한 과거 되짚기를 제외하면 스토리는 시간순으로 흘러갑니다. 문제는 씬과 시퀀스의 연결이 사건에 집중한 게 아니라 그냥 시간순으로 기계적인 연결을 보인다는 거죠.

그렇게 되니 계속 사건이 진행되면서도 중심이 안 잡혀 산만하게 보입니다. 아니 스토리텔링을 산만하게 하는 거 맞아요.

중심이 안 잡힌 건 스토리만이 아닙니다. 인물 감정선도 그렇습니다.

이건 배우들 연기 문제가 아니에요. 각본에 대사가 그렇게 쓰여있으면, 배우들은 그 대사대로 연기해야 하는 거죠.

그래서 대사가 담고있는 감정이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면 배우 연기도 혼란스러워지는 겁니다.

그 혼란이 의도한 거다? 그러면 싸이코드라마를 찍어야죠.



편집도 이상합니다.

감독은 어느 씬의 대사를 마치고 다음씬으로 전환할 때까지 있는 약간의, 1~2초 가량의 휴지기를 군더더기라고 생각하나 봅니다. 그래서 그 부분이 잘립니다.

근데 사실 그건 관객이 여운을 받아들이게 주는 시간이거든요? 그거 없으면 관객이 빠져들지를 못해요. 감정선에서 튕겨나오는 거죠.

그리고 까놓고 말해 이 영화에서 군더더기는 화약받으러 가는 여정에 쓸 데 없이 광활한 자연환경 보여주는 그 시퀀스지. '야 우리 이런 개쩌는 로케 잡아서 찍어왔다 이거 절대 못 뺌' 이러는 거 같잖아.


그리고, 저는 편집과 연출을 하나로 봅니다. 편집이 이상한 건 연출이 이상해서란 거죠.

감독은 상영시간 중 대부분을 '어둠'을 찍는 데 썼습니다. 그게 어떤 느와르의 색을 보이고 싶었든, 등장인물들의 불안과 불신 등을 표현하고 싶었든 너무 어둡게 찍었어요.

어둠은 그와 대비되는 빛이 있어야 합니다. 그 빛의 존재감이 확실함으로써 어둠은 여백의 역할, 가림의 역할을 합니다. 근데 빛을 소홀히 함으로써 과한 어둠이 스크린을 잡아먹었습니다.

그게..........적어도 한 시간 이상은 계속 그럴 겁니다. 폐색감을 주고 싶었든 어쩌든 이건 과잉이죠.


영화 초반 안중근의 지휘로 대한의군이 일본군을 공격하는 시퀀스는 처절했습니다.

그러나 시퀀스 후반으로 가면 처절함이 과해져, 배우들이 일부러 진흙탕에 몸을 비비는 것처럼 보입니다. 통 일어나지를 않아요.

일부러 바이올린 연주로 불안을 부추기는 음향? 좋습니다. 근데 등장인물들이 잠시 움직임을 멈춰서 이완되는 때까지 그 연주가 계속되면 안 되죠.

이게 연기가 어딜 갈지 몰라서 초조해하는, 자세는 가만히 서있지만 눈동자나 작은 동작으로 여전히 '움직임'을 지속하는 연기였다면 연주가 계속되는 게 맞습니다. 근데 아니었어요.

연기와 음향의 톤이 달라지니 음향이 붕 떠서 들리더라고요. 거기서는 연주가 갑자기 뚝 끊겨서 오히려 초조를 부추기는 연출을 쓸 수 있었을 텐데 아쉽습니다.


이 시퀀스에서 총성은 정말 좋았습니다. 우리가 영상물에서 흔히 듣는 '탕-!' 소리보다 더 저음역이 부풀려져서 거의 포성처럼 들리는 총성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아, 총성을 일부러 이렇게 연출해서 가슴을 울리게 하려는 거구나, 이게 마지막에 이토 쏠 때도 똑같은 총성이면 개쩔겠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안 하더라고요.

그 전투 시퀀스 이후 총성들은 우리가 흔히 듣던 소리만 나왔습니다...........장난하나.


안중근이라는 인물의 해석을 뮤지컬 <영웅>과는 달리 잡은 건 오히려 당연한 걸 겁니다.

다만 <영웅>을 너무 의식해서인지, '님들 이거 다 아시져? ㅎㅎ'하고 넘어가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게 암살 씬의 축약, 재판 씬의 생략, 처형 씬의 인간적인 반응이라는 점이 좀 문젠데.

제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처형 씬이군요. 어차피 재판 씬 같은 건 <영웅> 보면 되잖아.

안중근은 작중에서 두어 번, 죽은 동지들을 대신해서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목적을 완수한 뒤에는 죽음의 공포와 불안이 천천히 안도감 같은 것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요?


요는, 감독은 '신파'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려면 등장인물로부터 거리를 두는 연출을 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카메라의 거리는 어중간합니다. 등장인물을 충분히 이해하지는 못할 정도로 멀지만, 등장인물의 감정을 '관찰'하지 못할 정도로 가깝습니다. 관객은 공감과 타자화 어느쪽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역사관.

.........이건 감독이 좀 억울할 수 있겠다 싶습니다.

화약 입수하러 드넓은 만주벌판에서 말을 달리는 시퀀스 도중에, '옛날엔 다 이게 우리 땅이었는데'........흠, 음. 뭐 그건 그럴 수 있죠.

그보다 논란이 될 건 이토 히로부미의 대사를 통해 나오는 '어리석은 왕과 부패한 유생들' 운운하는 부분이겠죠.

다만 이토는 또한 '내가 통감으로 3년 일하면서 지난 수백 년보다 더 조선을 부유하게 해줬다. 돈을 얼마나 퍼부었는데 이 민초들은 왜 계속 일본을 증오하냐'라고도 말했습니다.

예, 식민지 근대화론 그 자체입니다.

이토의 대사에서 나오는 역사관은 식민사관 그 자체죠. 그걸 옳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 사관이 틀렸다는 건 이토가 '근데 왜 백성들이 이상한 힘을 내는 거지?'라고 의문을 갖는 데서 입증됩니다. 식민사관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니까요.

다만 이게 감독이 그냥 민중사관을 논한 거라고 하기엔 이순신을 거론하는 점이 다소 다릅니다. '민중+영웅사관'이라 해야 할까요? 그러면서 이순신과 안중근을 같은 위치에 두는 점은 애교.

물론 민중+영웅사관이란 결국 쇼비니즘, 보나파르티즘이고 더 나아가 지도자숭배의 파시즘으로까지 이어진다는 건........


애초에 이 부분은 감독의 사려가 부족했다고 봅니다.

이토의 입에서 저런 역사관이 나왔으면, 반대편에서 안중근의 입으로 그를 반박하는 대사가 나와야 합니다.

어려운 것도 아니에요. 안중근은 옥중에서 자신의 철학과 이념을 주장하는 글을 썼습니다. 이를 적당히 인용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애초에 두만강 건너다 갑자기 '아, 이토를 죽여야겠다' 이러는 식으로 연출한 감독에겐 무리였나 봅니다.

.....이토 암살로 가는 논리적 비약이 심했어요. 동지들이 포격으로 죽어나가는 장면은 생략했다? ㅇㅋㅇㅋ 그건 좀 비극성이 뻔하지. 근데 적어도 동지들을 잃고 혼자서 시련을 겪으면 그게 어느 정도는 독백이든 대사든 왜 이토를 죽여야 하는지로 연결되는 게 필요하지 않나요?

뭐 또 '<영웅>에서 보고 왔죠?'로 넘어간 느낌이긴 합니다. 근데 그건 결국 반쪽만 표현한 셈 아닌가 싶군요.



전반적으로 이 영화는 마치 각본가의 의도를 잘 파악하지 못한 감독이 멋대로 찍은 느낌이 강합니다.

근데 이게 각본가와 감독이 동일인물이라는 게 바보같군요.

물론 각본도 이상하다는 건 이미 말했죠. 이 감독은 무조건 각본가를 따로 구해야 한다는 걸 스스로 증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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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1 11:59:16 (6290일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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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1

에리그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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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역사관이 사실 독립운동사를 다루는 한국 영화계의 고질적인 문제이긴 합니다. 거의 병폐 수준이죠.

교과서에서 대충 배웠죠? 라는 식으로 대충 떼울 뿐 식민지 근대화론을 비롯한 식민사관들을 제대로 반박한 게 진짜 손에 꼽습니다.

그냥 민족사의 영웅들의 이미지를 방패 삼아 겉만 번지르르한 대사 무게 잡고 목소리 깔고 주절주절 떠들 뿐이죠.

논리적 반박은 하나도 없잖아요. 이런 걸 소재가 위대하답시고 빨아주면 안됩니다. 오히려 독립운동사에 대한 모욕이고 식민사관에 대한 또다른 옹호죠 사실.



그리고 이 감독은 전작에서도 마지막에 실제 목소리를 넣는 식으로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리더니, 결국 그 지점이 이 사람의 한계였다 봅니다.



오히려 더 퇴화했어요.

과유불급의 전형이었던 전작의 단점을 고스란히 가져오면서 심지어 연출은 더 구려집니다. 애매하고 역사관도 안중근의 후광에 기대어 그냥 누르고 갈 뿐 제대로 반박도 못하고 엉성하죠.



마치 이 작품에 반박하면 너도 왜구새ㄲㅣ다!!! 라고 짓누르는 기분이었습니다.

사실 한국 영화계의 독립운동사를 다루는 작품 태반이 이럽니다만...!



진짜 안중근 소재는 앞으로 무조건 걸러야하는 한국 영화계의 징크스라도 된 건가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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