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물_네타] [승부] 이게 12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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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살떨리는 게 어떻게 12세 관람가입니까.
어른이 봐도 무서움.
거의 스릴러라고 봐도 좋습니다.
각본, 연기, 연출 모든 면에서 빠지는 데가 거의 없는 명작입니다.
대사가 잘 안 들리는 부분은 있어요. 근데 이건 후시녹음 시대 이후 한국 영화의 고질병 같은 거니까요.
7~80년대 후시녹음의 부자연스러움보다는 차라리 이쪽이 낫죠. 솔직히 넷플릭스 올라오면 자막 있잖아.
각본이야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실화 기반이니 탄탄할 수밖에 없죠.
한창 잘나가던 시절 이기고도 농담으로 "졌지"라고 말해 버릇하던 조훈현이 패배하고 재기한 뒤에는 솔직하고 허심탄회하게 "이겼지"라고 말하는 데선 인물의 성장이 단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내가 질 리가 있냐'라는 오만한 마인드로 패배를 농담으로만 생각하던 사람이 발전했다는 게 잘 느껴졌어요.
이것도 실화 기반인지, 아니면 각본가가 의도해서 넣은 건지는 모르겠으니 일단 각본가를 칭찬합시다.
연출은 감독이 바둑을 참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습니다.
손이나 얼굴의 클로즈샷을 적극 활용해서, 미세한 손짓이나 표정 변화를 관객이 놓치지 않게 제대로 캐치하는 데서는 편집증 아닌가 싶을 정도죠.
조훈현이 패배 후 혼자 복기할 때 창에 비친 얼굴을 집어넣어 자기자신과 두는 듯한 모습은, 이창호에게 물려주는 바둑판 뒷면에 '바둑은 자기자신과의 싸움이다'라는 글귀로 의미가 명확해지죠.
메인 대국에서도 바둑알이 착수될 때의 가벼운 소리에 일부러 가슴을 울리는 저음을 겹쳐 사운드 효과를 준 게 적절한 무게감을 느끼게 하는 좋은 연출이었습니다.
시각과 청각 양면에서 참으로 좋았다,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연기.
논란이 된 문제의 배우 유아인을, 결국 빼지 못하고 넣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투톱 영화인 만큼 유아인과 이병헌의 연기가 어떻게 다른지 계속 느껴졌고요.
어떤가 하면........
이병헌은 첫 씬 첫 등장만 보고도 '이건 명작이다'라고 느끼게 만드는 힘이 있었습니다.
영화 내내 이병헌은 이병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병헌이 아닌 다른 배우가 연기하는 조훈현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이병헌을 보고 있는데 이병헌이 곧 조훈현이라고, 설령 조훈현 본인과 나란히 서있어도 이병헌이 진짜 조훈현이라고 생각될 것 같은 연기력이었죠.
반면 유아인은 정면에서 보는데도 유아인이 안 보였습니다. 낯설 정도였죠.
눈코입의 배치가 달라진 듯, 얼굴근육 자체가 변형된 듯한 연기. 옆얼굴 나올 때야 유아인 맞구나 하고 알아볼 정도?
결말 근처에 간 인터뷰의 '자신감을 가진 이창호'를 연기할 때는 약간 유아인 본인이 보였지만, 그 이외에는 이창호 그 자체였습니다.
이병헌이 자기라는 그릇 안에 조훈현을 담았다면, 유아인은 자기라는 옷감에 이창호를 물들였습니다.
솔직히 유아인의 현실 이미지와 이창호의 이미지는 결코 안 맞았는데,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하면 편집할 수가 없죠.
영화 전반적인 감상을 하면, 예고편에서 나온 "지금이라면 바둑의 신이랑 둬도 지진 않을 것 같다"는 말이 화근이 되어 바둑의 신이 "오냐 그래, 한 번 정말 그런가 보자"하고 강림했다........같은 걸 기대했습니다.
비슷하지만 달랐습니다. 전반부에서 이창호는 그렇게 초월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계속 답답해하고 주눅들고, 노력하고, 그러다가 각성하는.........근데 그게 너무 빠른, '괴물'이죠.
이창호가 아버지의 시계점을 떠올리며 마인드를 가라앉히고 각성하는 씬은, 물론 아마 실화 기반이겠지만, 제게는 시계로 상징되는 '시간의 흐름' 그 자체처럼 보였습니다.
요컨대 어떤 절대자도 영원할 수 없다, 조훈현도 필연적으로 노쇠하고 패배하여 사라질 존재다, 그리고 그 패배가 지금 여기 태어났다.......
아무래도 영화 자체가 조훈현의 시각으로 그려지기에, 이창호의 내면을 보여주는 장면에서조차 그것을 조훈현의 관점에서 보게 되더군요. 그래서 그거 좀 다크소울에서 보스 스테이지 전개되는 그런 느낌으로 전율했습니다. 개무서워.
그런 걸 보고 나니 흑돌에서 피가 나는 그 연출은 진짜 섬뜩하게 다가오죠.
그러나 후반부.
조훈현이 패배를 마주하고 성장하여 마침내 이창호를 이겨내는 메인 대국.
이번에는 백돌에 금이 가서 갈라지는 연출로 돌려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키운 괴물-혹은 바둑의 신에게 도전하는 인간승리 드라마가 아니라, 승부는 결국 상대가 있어야 함을 되새기는 결말로 온전히 수렴합니다.
그 결말을 보며, 나란히 걸어가는 조훈현과 이창호의 장면에서 <눈마새>의 에필로그를 다시 읽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바둑은 자기자신과의 싸움이지만, 또한 홀로 둘 수 없다는 묘한 모순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바둑에는 상대가 필요합니다. 자신이 최선을 다해 모든 것을 쏟아부어도 받아줄 수 있는 상대가.
이기고 지는 것은 중요하죠. 하지만 바둑 그 자체가 계속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 메세지로 수렴된 결말이, 그 결말을 받아들이게 하는 전개가, 참으로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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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AA 1관 - 그건 맞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아부터가 의뢰인이 괜찮은 사람인지를 확인한 거고요. 현실에서는, 제대로 전문지식이 있고 이를 자격증으로 증명한 사람에 의해 더블체크가 되는 제도인 만큼 작중 상황처럼 얼렁뚱땅 넘어가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일이 터졌을 때 감리 등을 욕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고요.2025-04-02
댓글목록 3
쟌리님의 댓글
아스펠님의 댓글의 댓글
마인드 스포츠인 바둑의 두 면모, 조훈현처럼 바둑판 밖의 치사한 전술까지 불사하며 상대의 멘탈을 흔드는 마인드 게임이냐, 아니면 이창호처럼 반대로 인간적 요소를 완전히 배제한 바이오 컴퓨팅이냐를 전부 다 잘 보여주어 바둑의 매력을 분명히 드러낸 좋은 영화인데........
키바Emperor님의 댓글
유아인 배우는 진짜 이전부터 연기도 잘하고 좋아하는 배우였는데 논란이 많이 아쉽지만 진짜 연기는 최고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