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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잡담

[조언] 말하지 말고 보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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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 원고를 보내든, 공모전을 하든, 작가지망생들에게 요구되는 게 하나 있습니다.
시놉시스. 이 소설이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전개될지를 요약해서 말하는 것.

사실 저는 이걸 못합니다. 꼬꼬마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게 안 됩니다.



이 시놉시스를 잘 쓰면 도움되는 곳이 어딘가 하면, 웹연재할 때 작품소개입니다. 이게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작품소개만 잘 써도 초반부 독자 유입에 도움이 됩니다.

표지 일러스트? 어차피 샘플 이미지로 조그맣게 뜨잖아요? 현미경으로 보는 것도 아닌데 뭘.

제목으로 아무리 어그로를 끌어도 작품소개가 좀 아니다 싶으면 안 봅니다. 제목 어그로를 어떻게 할까 하는 고민의 90%는 작품소개를 어떻게 쓸까로 방향전환하는 게 맞습니다.



그리고 딱 거기까지만.



프롤로그부터 한 3편 정도만 보면 웬만한 독자들은 글을 판가름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 안에 독자들을 잡아둬야 합니다.

이 때부터는 시놉시스처럼 써서는 안 됩니다. 시놉시스와 작품소개는 독자에게 '말하는' 것이지만, 프롤로그부터는 독자가 '관람하게' 해야 합니다.

독자는 내 말을 들으러 온 게 아니라 이야기를 보러 온 겁니다. 이건 큰 차이가 있습니다.



주인공의 회귀나 재기 등의, 도전이 중요한 주제가 되는 소설이 있습니다. 사회적 성공이라거나 직업적 성공 같은 거.

그 경우 보통은 주인공이 이런저런 밑바닥 시궁창에서부터 시작하기 마련입니다. 네, 고구마죠.

물론 독자들은 고구마를 싫어합니다. 억지 신파를 싫어하듯. 그렇지만 그걸 생략한답시고 이러쿵저러쿵 줄줄이 글을 써대는 건 더더욱 싫어합니다.

예를 들어 스타워즈 처음에 항상 나오는 그 길고 긴 글들을 소설로 본다고 생각해 보세요. 뭔 짓이야 그게.



초반 고구마 끝에 성공의 계기를 주는 건 검증된 방식입니다. 이 방식을 쓰고도 실패하는 건 둘 중에 하나죠.

첫째, 고구마를 너무 길게 넣었다. 인생이 완전히 막혀서 막막한 걸 보여주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그렇게 풀면 안 됩니다. 성공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하나둘 풀어서 '예전에는 이런 문제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해결되는 중'으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건 고구마가 아니거든요. 독자들이 '아, 주인공이 알고보니 이런 어려움도 있었구나. 그런데도 꿋꿋이 이겨내다니 대단한데?'라고 생각하게 될 뿐이지. 어차피 성공 스토리라면 이렇게 활용해야죠.

둘째, 쓸 데 없이 글만 썼다. 소설인데 글이 머리에 안 들어오는 겁니다. '주인공은 한때 잘나가는 스포츠선수였는데 부상을 입고 은퇴한 뒤 하는 일도 없이 빈둥빈둥 어쩌고 저쩌고'.......그래서 어쩌라고?! 독자가 주인공을 아는 건 중요하죠. 그렇지만 그건 독자가 주인공을 '알아가는' 것이어야지, 작가가 독자에게 주인공을 '알려주는' 것이어선 안 됩니다. 저렇게 길게 쓴 글이요? 저건 소설 아닙니다. 소설 보러 왔는데 소설이 없으면 그건 그 자체로 문제죠. 고구마 분량이 짧다고? 아니, 연재한 글 용량 중에 소설이 없는데 무슨 고구마와 사이다가 있어요? 저건 고구마의 함량이 어떻다 따지기 이전의 문제입니다.





소설은 단순히 줄거리가 있는 글이 아닙니다. 대화도 넣고 배경도 넣고 동작도 있어야 하고 캐릭터가 움직인다고 써줘야 하고.......이런 걸 쓰는 게 낭비 같아 보이겠지만, 사실 그런 장식들이야말로 소설의 본질이에요. 작가가 어떤 말을 하고 싶다면 줄이고 줄여서 최대한 단적으로 한 마디, 저 대화와 배경묘사와 감정들 사이에 살짝 넣어줘야 합니다.

애초에, 뭐가 중요합니까? '얘가 이렇게나 불쌍하고 절박한 애예요'라고 말하는 이유가 뭔데요? '그러니까 얘는 성공해야 돼요. 정말 성공해야만 한다고요!' 이걸 말하려는 거잖아요? 독자에게 감정적인 동의를 얻기 위해서. 그냥 '얘는 재능 있어요. 엄청 잘났어요'라고 하면 '뭐야, 주인공 재수없어'라고 뒷말 들을까봐 미리부터 동정표 얻는 거 아닌가요? 밑바닥부터 올라간다는 상승의 카타르시스도 중요하겠지만.

결국 본질은 주인공이 성공하는 것이며, 거기에 대한 독자의 감정적인 동의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인물과의 대화나 상호작용 속에서 주인공의 매력을 보여주기만 해도 됩니다. 주인공의 불쌍한 처지를 구구절절 늘어놓는 것은 '야, 내가 이렇게 쩔어주는 캐릭터 설정을 했다!'라고 자랑하는 거랑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설정을 잘했든 못했든 본질적으로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 설정을 굳이 다 안 보여줘도 제대로 살릴 수 있는지가 중요한 거죠.



'불행한 처지'는 그 캐릭터의 부수적인 설정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설정은 마이너스 통장의 한도와 비슷해요. 저축통장이 아니라 마이너스 통장이라는 게 중요합니다.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꺼내서 써야지, 한번에 왕창 가져오는 건 바보짓이죠. 미리 설정을 만들어놨다 해도 그걸 왜 벌써 깝니까? 조금씩 가져와서 가장 유효하게 활용해야 하는 겁니다.

그 가장 유효한 활용이, 설정을 조금만 써도 되도록 다른 것들을 넣는 것입니다. 대화, 배경, 동작, 사건, 다른 캐릭터 등등등.......이게 보여주기 기법이죠.



프롤로그를 쓴다면, 열 문장 이내에 대화가 나오게 써야 합니다. 여기서 대화란 독백도 포함합니다.

물론 이런 일률적인 계산은 소설이라는 생물을 너무 경직되게 대하는 위험이 있습니다...........그래서 열 문장이라고 한 겁니다. 아니 웹소설에서 열 문장이면 아무리 짧아도 예닐곱 줄은 차지하는데, 그 예닐곱 줄 안에 하다못해 독백조차 없으면 그게 소설이여?

소설이 아니라 연극 대본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본문은 다 지문이고, 대사만 나온다고 생각해 보세요. 연극의 막이 오르고 시작을 했는데 배우가 무대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서 5분 동안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면.......그거 관객이 좋다고 보고 있겠어요? 관객동원이 많기를 바라면서 그런 대본을 쓰고 있는 건 문제가 있는 거죠. 마찬가지로, 독자가 많기를 바라는데 대화문도 안 쓰면 그건 문제가 있습니다.

굳이 콕 집어서 대화를 기준으로 삼은 것은, 대화와 본문은 흐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A: 오늘은 날씨가 좋네.



(본문 한참 주절주절)



B: 응, 그렇네. 햇살이 정말 화창해.



같은 장면 안에서라면 대화문은 중간에 본문이 아무리 들어가 있어도 그걸 무시하고 대화문끼리 흐름이 이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대화문과 본문은 서로 연결되어서 또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렇기 때문에 대화를 넣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소설의 전개방식에 변화를 주게 됩니다. 본문에서 아무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려고 해도, 대화문과 연결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장식이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위에서 제가 장식이 뭐라고 그랬죠? 소설의 본질이라고 했지요. 예, 장식을 넣을 수밖에 없기에, 소설의 본질이 생성됩니다. 이 때부터 글은 소설이 됩니다. 그 전에는 그저 작가의 독백에 불과하죠.



물론 처음부터 주인공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게 아니라 배경묘사, 인물의 표정, 동작 등을 쓴다면 굳이 대화를 쓸 필요가 없겠죠. 그런데 그게 되는 작가라면 애초에 대화를 배제하고 줄글만 쓸 이유가 없습니다. 대화가 얼마나 편리한데.

소설에 독자를 몰입하게 하는 건 역설적으로 독자 자신이 소설로부터 유리되어 있다는 느낌 그 자체입니다. '나'를 의식하지 않고 소설 속에서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는 걸 '내가' 보고 있다는 느낌. 작가가 독자에게 '얘는 이러쿵저러쿵해서 어쩌고저쩌고할 건데요'라고 말하는 순간 독자는 '안 사요'를 외치는 겁니다.

말하지 말고 보여줘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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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1 11:59:16 (6157일째)
팀 통조림 게으름뱅이 편집자 아스펠입니다

댓글목록 5

쟌리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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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주인공의 성격이나 그런 것은 이야기가 진행하다보면 자연스레 알 수 있지요.(다만, 요즘 독자 성향상 그렇게 자연스레 알기 귀찮고 프롤로그 부터 다 스포하라는 자세라 그 보여주지 않고 말하는 것의 문제가 빈번하게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div>다만, 고구마라고 표현하신 것이 요즘 대세가 그렇기 때문에 아스펠님이 그렇게 표현한다는 것을 알지만 고구마를 많이 먹어야지 배가 찰 수 있기 때문에 고구마를 많이 먹였다라고 해서 이것이 고구마 글이라고 표현되는 요즘 시대가 영 슬프네요...(물론, 고구마만 먹으면 그렇기 때문에 윤활유가 되고 맛이 배가 되는 우유도 필요하기는 하지만요.... 사이다요? 고구마에 사이다는 사도!!!(응? 전국의 고구마 사이다 조합을 좋아하시는 식성의 취향분들 죄송합니다.) 사이다패스들은 너무 질려....)</div>

아스펠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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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대세가 그런 게 아니라 독자들 중 대다수는 원래부터 일정 이상의 답답함을 참지 못합니다. 웹소설은 호흡이 짧아지면서 독자들이 참아줄 수 있는 한계선을 대폭 낮춘 것일 뿐이죠. 그리고 작가지망생은 일단 여러 독자들이 글을 읽어줘야만 발전할 수 있어요.

<div><br /></div>

<div>요컨대 글 좀 재밌게 쓰라고......소설가로 대성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소설의 재미부터 챙겨야 한다고......그게 첫 단추인데 그것조차 못하면서 무슨 소설을 쓰겠다는 거야.....</div>

쟌리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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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일정 이상의 답답함을 참지 못하는 것을 알지만...



<div>너무 한계선이 낮아진 것이...(옛날에는 애니 48화가 기본이었는데 요즘은 24화도 길다고 하니...)</div>

에닐님의 댓글

쿠쿠케케코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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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설명충 냄새가 아주 진득한 작품같은 경우

<div>걍 설명 없는게 더 나아보일정도입니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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