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언] 누군가 웹소설의 미래를 묻거든-

본문
-고개를 들어 뒤마를 보게 하라.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복수물이라는 장르를 시작해서 끝내버린 전설 중의 전설입니다. 이 소설의 플롯은 하나의 전범이 되어 아내의 유혹 이래 복수물 막장 드라마의 플롯으로 계속 써먹히고 있지요.
그런데, 기본적으로 이게 쓰여지던 시기에는 신문이나 잡지 연재를 하던 시기이고 작가들은 글자수에 따라 고료를 지급받았습니다. 네, 현재 웹소설의 수익구조와 똑같습니다.
그런고로 웹소설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 이해하기 위해서, 살펴볼 가치가 충분합니다.
제가 읽고 있는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번역본은 총 5권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 중 1권 끝에서야 에드몽이 몽테크리스토 섬의 보물을 찾아내지요.
요컨대 복수물이라고 하지만 복수만을 쓰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1/5 분량을 빌드업에 써먹고 있어요. 그리고 놀랍게도 그게 지루하지 않습니다.
사실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2차창작물이나 아류작들은 여기에 그렇게 큰 비중을 두지 않습니다. 사실 중요한 건 복수고, 독자-관객-시청자가 원하는 것도 복수죠.
그러나 뒤마는 독자가 '않이 쓉 복수 왜 안 나와?!'라고 따지지 못하게 만드는 스토리텔링을 자랑합니다.
저는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첫 챕터, 프롤로그 역할을 하는 부분을 현행 웹소설 프롤로그로 삼아도 충분히 먹힌다고 봅니다.
불길한 분위기가 감도는 배의 귀항으로 소설 전체의 분위기를 미리 예고하면서, 동시에 배의 선주인 모렐의 시선을 독자와 일치시킵니다.
주인공인 에드몽을 보여주며 그 캐릭터를 잘 보여주고 모렐이 그에게 느끼는 친근감을 독자에게도 전염시키죠.
그 다음엔 빌런 중 하나인 당글라르를 보여주는데, 그에게서 음험한 느낌을 주면서도 오히려 대화 내용은 에드몽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키게 합니다.
여기서 다시 에드몽이 나와 당글라르와 그의 악감정이 생긴 계기를 알려주고, 에드몽에 대한 의심을 부분적으로 풀어줍니다. '전부'가 아니라 '부분적'이라는 것이 꺼림칙하죠.
마지막으로 다시 당글라르를 내세워 에드몽에 대한 의심을 부추기는 동시에 에드몽이 입신출세할 거라는 것을 알리고, 당글라르의 시기를 보여줌으로써 앞으로의 전개를 느끼게 합니다.
보면 에드몽과 당글라르가 번갈아 모렐과 대화하면서 자연스럽게 정보를 풀어내고, 동시에 독자의 흥미를 끄는 장치가 되어 있습니다.
잘 쓴 웹소설은 영화처럼 씬을 나누기 마련인데, 뒤마 당시에는 영화가 아니라 연극이 있었으니 마치 연극 무대처럼 등장인물들이 움직이는 거죠.
이 장치를 개연성 있게 풀어낼 수 있었던 건 '입항 절차를 에드몽이 지휘하기 위해 자리를 비워야 함'이라는 단 한 가지 요소. 이걸 잘 사용해서 당글라르가 에드몽이 자리를 비운 틈에 모렐에게 쏙닥거릴 수 있게 만듬과 동시에 에드몽이 얼마나 리더십이 강하고 실력이 뛰어난지를 보여줍니다.
캐릭터와 사건 전개의 단서를 동시에 보여주는 훌륭한 프롤로그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뒤로 에드몽은 몇 개 연재분에 걸쳐 꾸준히 행복한 모습, 상승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타 복수물들처럼 첫 화에 진창에 빠져서 거기서부터 올라가는 방식이 아니란 게 중요합니다.
시대상 때문에 다소 화려한 문체-라기보다는 고료 떼먹기 위해 장식된 문장들-를 제거하고 보아도 에드몽이 단숨에 몰락하는 게 아니라 그 행복을 향해 차근차근 올라가는 도중에 빌런들이 등장하고 서로 연결되어 음모를 꾸미는 빌드업이 진행됩니다.
여기에 적당히 에드몽을 질투하지만 딱히 빌런은 아니라서 그 음모의 증인이 될 수 있는 캐릭터까지 들어가니 독자들이 반전을 기다리게 되죠.
뭐, 물론.......아시다시피 에드몽은 약혼 피로연에서 잡혀가게 됩니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영화나 뮤지컬에서는 이렇게 잡혀간 에드몽이 검사 대리 빌포르의 자기보신과 야망 때문에 샤토 디프에 갇히고, 거기에 바로 포커스를 맞추어 14년의 수감 생활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소설에서는 그게 아니에요. 뒤마는 여기서부터는 빌포르의 시점을 보여줍니다. 빌포르는 야망을 위해 왕당파가 되었지만 아버지가 골수 자코뱅이자 나폴레옹 지지자라서 위치가 매우 위태롭죠. 그는 다른 두 빌런들과는 달리 양심도 있고 매력도 있는 캐릭터입니다. 독자가 이입하기 좋고,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도박과 기지를 통해 해결해냅니다.
여기에 그의 아버지 누아르티에가 씬 스틸러로 등장해 어마어마한 포스를 풍기죠. 수완과 대담함을 가진 진짜배기 거물의 모습이 대단히 인상적입니다.
이렇게 빌포르의 시점을 통해 에드몽이 잡혀간 뒤 정세가 어떻게 바뀌는지를 보여주고, 그 마지막에는 독자들이 꽤 매료되었을 빌포르 또한 결국에는 빌런임을 보여줍니다. 여기까지 오면 1권의 1/3 정도는 되는 분량입니다.
무슨 말이냐? 이제 늘어져도 된다는 말이죠.
'저는 하차합니다. 작가님은 상하차나 하세요'라는 말을 하기엔 이미 늦은 시점.
바로 이 때부터는 전개상 좀 늘어져도 됩니다.
샤토 디프 부분은 다소 늘어지는 감이 있습니다. 일단 에드몽의 심리 묘사가 길게 들어가니까요. 이건 전개상 필수적인 부분이지만, 만일 초반을 생략하고 입항-약혼 피로연에서 체포-빌포르 때문에 샤토 디프 순으로 빨리빨리 들어왔다면 여기에서 독자들이 다 하차했을 겁니다.
복수물이니까 복수를 하게 된 사정을 핵심 요약하고 넘어간다? 그게 아니란 거죠. 그렇게 되면 샤토 디프도 압축 생략을 해야 합니다. 그게 몬테크리스토 백작 뮤지컬에서 벌어진 참사죠. 그거 노래 몇 곡은 좋지만 스토리가 쇝이야.
플롯 상으로 볼 때 에드몽의 감정선은 시작에서 위태위태하게 상승하다가 체포당하면서 확 밑바닥으로 쳐박힙니다. 이게 주인공 시점만 다뤘더라면 여기서 독자들이 하차합니다. 그런데 뒤마는 이 시점에서는 아예 에드몽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빌포르의 위기 관리에 대해 포커스를 맞추거든요. 하락할 뻔했다가 상승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에드몽의 감정선을 덮어버립니다. 예술적이죠.
그리고 마침내 빌포르가 안정을 되찾고 다른 캐릭터들도 어땠는지 대충 언급하게 되면, 독자들이 하차하기엔 너무 멀리온 지점이 됩니다. 이제 독자들은 다음이 궁금해서라도 볼 수밖에 없음.
파리아 신부에게서 기연을 얻는 부분은 상당히 많은 무협지들에서 많이 오마주했죠. 감옥에 갇힌 노인과 젊은이, 두 사람의 감정적 연대, 노인이 평생 갈고닦은 지식을 물려받는 젊은이........네 뭐 뻔합니다.
그런데 이 기연 부분은 샤토 디프에 들어오고도 좀 지나서야 나온다는 걸 특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게 독자들 반응은 안 좋겠지만, 전체적인 완성도를 위해서는 충분히 묘사되어야 하는 빌드업 과정을 앞에 뒀기 때문이죠. 아, 물론 고료도 뜯어내고 말이죠.
파리아 신부의 방대한 지식이나 그의 특별함에 대해서도 뒤마는 적절한 설명을 내놓습니다. '5천 권의 장서 중 가장 핵심적인 150권을 추려 그것을 3년동안 달달 외웠다'는 설명에는 '오, 그 정도라면 똑똑한 사람이라면 그럴 법도 한데?'라는 생각이 듭니다. 파리아 신부가 감옥 내에서 만들어낸 도구들은 오랜 수감 생활과 남다른 발상력은 물론이고 다소 특별취급을 받은 덕에 가능했고, '님처럼 대단한 사람이면 감옥 밖에서는 더 대단했을 수도 있겠는데?'라는 먼치킨 의혹에 대해서는 '아니, 감옥 안에서니까 오히려 이런 게 가능했지 밖에서는 나도 평범했을 것'이라고 무마하죠.
저런 설명들이 실제로 맞는가 아닌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독자가 떠올릴 법한 의문을 적절한 타이밍에 비교적 그럴 법한 대답으로 해소해주는 것이 중요한 거죠. 파리아 신부는 누가 뭐래도 에드몽을 위한 편의주의적인 캐릭터예요. 그러나 그 편의주의가 충분히 말이 되는 설명을 같이 갖고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파리아 신부의 기연은 결국 이후 에드몽이 펼칠 먼치킨 행보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장치입니다. 그렇지만 그 개연성 있는 기연을 말하기 위해 활자를 낭비해도 되는 건 아니죠. 독자들이 하차하면 의미가 없잖아.
그래서 뒤마는 빌포르의 시점을 넣어가면서 독자들이 완전히 낚시바늘을 꽉 물게 만들 때까지 기다린 겁니다. 이제 독자들은 에드몽이 절망에 빠져 허송세월을 해도 하차하지 못하고, 파리아 신부의 등장 뒤에는 두 사람의 탈옥 준비 과정을 보며 에드몽이 허송세월하던 파트와 비교해가며 '오오, 이제 뭔가 되려나 보다'하고 기대하게 되고, 그 도중의 사소한 것들에도 일희일비하게 되죠.
그리고 마침내 에드몽이 탈옥한 뒤에는? 자, 즉시 시간 스킵하고 부유한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복수극이 시작되나?
갑자기
분위기
모험물.
여기서 작가는, 자기는 결코 고료를 뜯어내려는 목적이 아니라, 단지 현실성을 따져보는 것일 뿐인 척합니다.
밀수업자의 배에 구출되고, 원래 뱃사람이었으니 거기서 뱃일을 하고, 몽테크리스토 섬을 눈 앞에 두고도 몇 달이나 들어가지 못하는 개연성을 마련하죠. 이 반쯤 해적들인 놈들과 보물을 나눠가질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 그들을 속여서 독차지해야지.......예, 사이다패스 독자들이 만족합니다.
결코 그냥 짠 하고 보물을 발굴하는 게 아닙니다. 믿을 사람 하나 없는 외톨이 신세라는 것, 그리고 보물이 있는데 그걸 못 가진다는 상황을 이용해 스릴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면서 분량도 챙겨가는 거고.
복수물이란 복수를 이뤄가는 과정이 물론 본론이지만, 그 전에 복수를 하기 위해 빌드업을 해가는 과정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거죠.
주인공이 그냥 서브퀘스트 깨는 느낌으로 다른 이야기에 끼어드는 거라면 여기서 다시 하차 대란이 벌어질 겁니다. 그러나 결코 그게 아니죠.
에드몽이 그 보물을 얻는 이유는 서브퀘가 아닙니다. 그 정도 재산을 그는 복수의 수단으로 삼으려 해요. 그렇기 때문에 다소 돌아가는 느낌이 있어도 중심을 유지하고 메인퀘스트의 줄기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독자들은 여기서 외도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복수를 위한 또 한 단계의 빌드업이라고 생각을 하지. 그러면서 동시에 지중해 연안항해를 다룬 모험물 테이스트까지 느끼고. 이거 완전 원 플러스 원 아닙니까.
아직 복수를 하는 본론에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이미 충분히 재미가 있고 만족스럽단 말이죠. 그러면서 지금까지의 완급조절을 생각하면 작가가 다소 늘어져도 기다려줄 수 있는 신뢰가 쌓인 겁니다.
여기까지 오면 작가는 뭘 써도 됩니다. 이제 분량 좀 집어먹고 고료 좀 뜯어내도 누가 뭐랄 사람 절대 없습니다.
뒤마는 마치 독자 낚는 어부와도 같은 절묘한 조절을 보여줍니다. 저는 이 초반부에서 가장 진주같은 부분이 바로 빌포르 시점이라 생각합니다. 마치 정치물 같아서 흥미진진한 것도 있고, 빌포르가 이 때는 상당히 매력적이고 호감 가는 캐릭터여서 소설의 메인스트림과는 전혀 관계없음에도 독자들을 붙잡는 역할을 하거든요.
디테일을 살짝 바꾼 것에 불과한데도 소설은 2차창작물과 아류작들이 쉽게 넘어서지 못하는 초반 고구마 파트를 독자들이 넘기게 만들어 줍니다. 주인공이 그냥 완전 바닥에 쳐박혔다가 갑자기 시스템 얻고 내가 제일 잘 나가 찍는 스토리라인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무엇보다 더 매혹적인 스토리라인이죠.
이런 변주법은 웹소설 작가들이 분명히 연구해서 써먹을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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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18
물리학도2012님의 댓글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아스펠님의 댓글의 댓글
뷰너맨님의 댓글
고전을 지금 시점에서 다시 살펴보면 "발굴" 하는 맛이 있지요. 한번쯤 시류를 벗어난 무언가를 보고 싶다면 성공한 고전을 살펴보면서 자신의 수준을 높여봅시다.
재밌는 이야기의 겉만 보면 그 이야기를 모두 파악할 수 없지요.
아스펠님의 댓글의 댓글
고전에서 플롯이나 캐릭터 구도만 베껴올 게 아니라 이런 완급 조절의 기법을 배우는 게 더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뷰너맨님의 댓글의 댓글
아스펠님의 댓글의 댓글
쟌리님의 댓글
하지만, 그런 지위를 손에 넣은 것은 세월 때문이 아닌, 아스펠님의 말씀대로 그 이야기에 담긴 스토리텔링의 재미 때문이겠지요.
아스펠님의 댓글의 댓글
Eida님의 댓글
아스펠님의 댓글의 댓글
.....솔직히 그런 말 한 번 들어보는 게 소원입니다. 근데 코난 도일 관점에서 보면 진짜 자기가 쓰고 싶은 건 반응이 안 나오니 스트레스 받는 게 당연하기도 하고......으음, 부럽지만 부럽지 않다....
항상여름님의 댓글
아스펠님의 댓글의 댓글
assassin님의 댓글
이제와서 고전 명작들을 읽어 볼 수나 있겠나 싶었지만 의외로 부드럽게 읽히고 흥미진진한 재미가 있어 정신없이 보게 되더군요. 명작은 명작인가 봅니다.
여우신랑님의 댓글
골뱅C님의 댓글
odeng1004님의 댓글
공자님의 댓글
......사족이지만, 어째서인지 중간에 "몽테크리스토의 백작의 글"이라고 썼었습니다.
뭐야 이거;;
노신님의 댓글